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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Ch. 4


지난 밤까지 바디우가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네 가지 영역 가운데 정치, 사랑, 예술을 다뤘습니다. 오늘은 과학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을 살펴봅시다. 앞선 대화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타르비가 먼저 바디우에게 묻습니다. 기술과 과학,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맺는 관계를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면서요.

본격적으로 과학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을 다루기에 앞서, 타르비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제안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간단하게 짚어봅시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논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은 아마 이 주제를 다루는 가장 탁월한 통찰이라고 꼽기에 손색이 없을 겁니다. 타르비가 바디우에게 동의 여부를 묻는 하이데거의 관점은, 기술 발전이 인간을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에 빠뜨렸다는 하이데거의 진단입니다. 존재망각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인데, 여기에서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것 같군요. 다른 여러 철학적 사유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철학 역시 한 두가지 개념을 통해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선 우리는 타르비가 던진 질문을 따라 우리의 주제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살펴보는 게 좋겠네요.

간단하게 도식화한다면 존재망각을 다루는 하이데거의 접근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존재물음(Seinsfrage)’이 어떻게 망각되고 은폐되었는가에 대한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생활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에 접근입니다. 타르비가 인용하는 존재망각은 후자의 맥락에 속하는데,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이라고 개념화합니다. 존재망각이란 존재자가 자신의 본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지요.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망각이라는 사태가 벌어지는 까닭은 서구 문명의 기술적 특징, 특히 도구를 통해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찾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도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도구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도구는 사물의 일종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사물과는 다릅니다. 도구라는 사물은 인간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물들, 즉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특정하기 때문이지요. 하이데거는 도구의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가 변화한다고 지적합니다. 하나의 중립적 존재자로 존재하는 사물과 달리, 도구는 항상 어떤 목적을 전제합니다. 때문에 도구를 매개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항상 특정한 목적과 방향을 따르는 경험을 수반하지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기술은 인간과 세계를 중립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도구를 만들거나 택하는 인간 자신의 목적에 따라, 나아가 도구 그 자체의 성격에 따라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이렇게 도구와 기술을 매개로 세계와의 관계를 설정해 온 서구의 역사는 하이데거가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처럼 존재망각의 역사에 다름 아닙니다. 기술 문명의 진보는 결국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은폐하고,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존재를 망각하는 과정인 셈이지요.

사실 서구 문명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나 그것의 역사를 반성하는 것, 또 그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세계대전 이후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그 시대 사유의 특징입니다. 하이데거에 앞서 현상학을 정초했다고 볼 수 있을 후설은 ‘유럽 학문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오는 사유의 전통이 당대에 이르러 거대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하기도 했고, 아도르노는 보편자의 정립을 추구하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이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전체주의적 사고를 정당화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하기도 했지요. 대화에서 타르비는 ‘우울한 전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실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에도 존재망각을 극복하고 본래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인간과 기술>, <서구의 몰락> 등에서 드러나는 슈펭글러의 관점처럼 아예 다 글렀다, 식의 진짜 우울한 전망도 있지요.

앞서 바디우는 사건을 볼 수 없었던 것, 사유할 수 없었던 것의 가능성을 나타나게 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사실 과학이야말로 사건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꼭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가까운 얼마 사이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켰습니까? 물론 여기에 앞서 인간이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회전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면,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상상할 수 없었겠지요. 바디우가 인용하는 것처럼 다윈의 발견이나 프로이트의 통찰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심지어 프로이트는 과학이라고 거의 인정 받지도 못하는 처지인데도요!) 생각해보면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내연기관의 발명과 자동차의 보급, 건설기술의 발달과 교통망의 확충에 따라 생활 세계의 넓이 역시 어마어마하게 확장했고요.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겁니다, 과학 기술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 놓은 사례들은요.

… (중략) ...

바디우는 철학자는 수학적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연히 철학자가 수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사유의 형식으로서 수학적 직관과 철학적 사유의 유사성 내지는 인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디우가 여기에서 말하는 수학의 세계란 순수하고 강력한 개념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너무 강력한 나머지 경험에서 비롯한 직관이나 현상 자체를 비웃을 수 있을 정도로요. 이러한 관점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이념의 실재성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리수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즉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일상에서 무리수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굳이 찾자면 원주율 정도일까요? 일상의 수는 셀 수 있는 것, 셈할 수 있는 것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상의 세계, 일상의 수학은 유리수의 수학이지요. 하지만 무리수의 발견, 무리수에 통찰은 경험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바디우는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무리수의 발견은 수에 대한 일상의 진부한 관념을 조롱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요. 수학은 가장 순수한 이념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설령 그것이 경험과 직관에 반한다고 하더라도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타르비와 바디우의 대화는 이제 철학이라는 최종 장으로 나아갑니다.

2017. 2. 20.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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