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Ch. 2


정치에 대한 논의에 이어 바디우와 타르비는 이야기의 주제를 사랑으로 옮깁니다. 타르비가 먼저 아렌트의 말을 빌려 바디우에게 질문을 던지지요. 아렌트가 저술한 <인간의 조건>에는 사랑이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언급이 등장합니다. 타르비는 바디우에게 이 문구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사실 매우 독특합니다. 뭐 따지고 보면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예술이나 과학, 철학을 바라보는 바디우의 관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사랑에 대한 관점은 조금 더 특이한 축에 속한다고 할까요?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보다 성애로서의 사랑인데, 사실 철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사랑은 그리 중요한 탐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탐구의 대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무관심했다고 보는 게 더 가깝겠군요. 사실 어느 시기, 어느 사회든,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대체로 사랑이 인간사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무관심은 의아할 정도입니다.

타르비와의 대담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바디우는 이전까지의 철학이 사랑을 대해온 관점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그는 철학이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은 서로 상반되는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고 말하지요. 하나는 사랑 그 자체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성차에 대한 편견을 포함하는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신비화하고 탈세속화하여 사랑 자체에 지고한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이지요. 사실 두 관점 모두 굉장히 현대에 가까운 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디우는 두 입장의 대변인으로 각각 쇼펜하우어와 키에르케고르를 꼽는데, 둘 다 꽤 가까운 과거의 사람들이니까요. 그 이전까지는 사랑에 대한 변변한 논의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플라톤의 <향연> 정도를 제외한다면 의아할 정도로 철학은 인간의 사랑,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 타령하는 헤겔이나 인간과 사랑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칸트, 사랑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이 쉽게 그려지십니까? 플라톤이 위험성을 경고하고 배척하려 했던 예술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어쨌거나 바디우의 관점에 따른다면 철학이 사랑을 대하는 입장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거나, 신비화하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사랑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관점은 아예 논외로 친다면 두 가지 입장이 남는 셈인데, 타르비와의 대화에서 바디우는 정치적 은유를 사용해서 이를 사랑에 대한 좌파적 관점과 우파적 관점으로 구분합니다. 사랑에 대한 좌파적 관점은 사랑을 신비화하고, 사랑에서 초월적인 융합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들 가운데 상당수를 사랑이 아닌 것으로 기각합니다. 즉 사랑을 단순히 인간관계의 여러 유형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는 방식이나 일종의 계약관계로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 사랑에서 욕망과 쾌락의 원리만을 발견하는 입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 반대편에는 우파적 입장이 있습니다. 앞서 정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바디우는 현행하는 질서를 만든 사건의 진리에 종속되는 입장, 그것 외에 어떠한 사건의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우파적 입장이라고 가리킨 바 있습니다. 사랑의 경우에 이러한 입장은 안락함에 대한 환상으로서의 가족과 사회적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결혼이라는 관념을 사랑에 결부시키고, 마치 그것이 사랑의 전부이자 목표인 것처럼 여기는 입장을 가리키겠지요.

당연히 이들 두 입장은 상호배타적입니다. 현실적인 제도와 관습들,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안락과 행복을 중시하는, 중시해야 한다는,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파적 입장에서는 사랑에서 서로 다른 두 인간의 완전한 융합을 추구하는 좌파적 관점이 신기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겠지요. 반대편에서 본다면 사랑에서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를 연역하고 사랑을 그것에 묶으려는 시도는 세계에 대한 무책임한 타협이나 나약한 굴복으로 보일 테고요.

바디우는 두 입장 모두를 비판합니다. 사랑은 이들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면서요. 바디우는 오늘날 사랑을 둘러싼 수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그것이 갖는 본질적 속성을 구해낸 뒤에, 그 속성을 기반으로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바디우가 주목하는 지점은 무엇보다 사건으로서의 사랑이지요. 바로 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도입하는 사랑, 우발적인 것, 전적으로 우연에 속하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랑입니다.

바디우는 정치가 끝나는 곳에서 사랑이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정치를 여럿에서 하나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사랑을 하나에서 둘로 나아가고 그 둘의 차이를 지속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 (중략) ...

앞서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바디우는 사건을 ‘보이지 않던 것, 사유할 수 없던 것의 가능성을 나타나게 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한 바 있지요. 사건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비단 정치적 (영역에서의)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건, 예술이라는 사건, 과학이라는 사건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의입니다. 충실함(fidèle)에 대한 정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바디우는 충실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힙니다만, 이것 역시 단순히 사랑이라는 영역에 국한되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진리 절차에 공통되게 적용되는 의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에서 충실성을 묻는다면 상대방에 대한 충실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타르비가 바디우에게 충실성에 대해 물었을 때, 바디우는 그것의 의미를 ‘모든 진리의 기원이 사건이라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바디우에게 충실성이란 단순히 특정 상대에 대한 신실함이나 헌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디우는 충실성이 사건의 결과, 명명의 결과, 약속과 선언의 결과를 떠맡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초의 사건에서 비롯되는 결과들은 전개될 것이고, 전개될 필요가 있지만 저절로 그렇게 펼쳐지지는 않겠지요. 사태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끈질김이 필요하고, 바디우가 말하는 충실성이란 바로 이 끈질김을 이어가는 것, 사건의 결과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충실성은 사랑뿐만 아니라 정치, 예술, 과학을 포함해 바디우가 사건이라는 진리의 절차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든 영역에서 사건의 주체에게 요구되는 일종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바디우와 타르비는 이제 예술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2017. 2. 6. / Alter Ego

info@labyrinthos.co.kr

#labyrinthos #라비린토스 #바디우 #알랭바디우 #철학과사건 #LaPhilosophieEtLEvenement #Badiou #AlainBadiou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