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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Ch. 1


지난 시간에 바디우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열쇠말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 사건, 주체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요? 오늘은 타르비의 질문을 따라, 바디우가 소개하는 그의 철학을 함께 살펴 봅시다.

대화를 시작하며 타르비는 바디우에게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그의 철학에 접근할 것을 제안합니다. 정치는 바디우가 제시하는 철학의 네 가지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바디우의 삶과 저작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바디우 철학이 난해하게 여겨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바디우의 철학에서 그가 속한 전통이나 다른 철학들과의 관계가 언뜻 쉽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었지요? 정치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사유하는 두 가지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즐겨 참조하듯 고대 그리스 전통에 기댄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관점이지요. 바디우 자신이 대답하는 내용을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관점을 실마리 삼아 그가 말하는 정치에 접근해 봅시다.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타르비의 질문에 바디우는 우선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은 정치적 전통의 중요성을 상기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 가운데 ‘적들(ennemis)’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요. 바디우가 말하는 적이란 단지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집단, 단순한 반대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디우에게 적이란 우리가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정치란 무엇보다 이러한 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한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입장들이 존재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다른 한편의 입장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디우가 언급하는 정치의 출발점으로서의 적은 특정한 집단이나 입장이 아닌 무엇보다 적이라는 절대적 이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적이라는 이념을 정치의 복판으로 끌어온 사람, 정치에 있어서의 적이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가장 본격적으로 사유한 사람은 아마 칼 슈미트일 것입니다. 사실 정치의 문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언제나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디우가 정치, 사랑, 예술, 과학을 철학의 네 가지 조건으로 꼽으면서도 비대칭적으로 보일 만큼 정치에 많은 사유를 할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흔히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서 유명 정치인이나 정당, 선거와 제도들, 각종 뉴스와 선전을 떠올리지만,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 층위에서 정치의 문제를 사유하지만) 정치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요? 쉽게 말하자면 결국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살아간다는 당면 조건이 바로 정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나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 나의 생각과 어떠한 접점도 갖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즉시 정치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도록 강제합니다. 결국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진리를 구축하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과, 또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고도로 관료화된 대중 사회는 이런 직접적인 조우와 마찰을 (마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하지만, 사태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철학이 묻듯 진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지요. 단순히 경험적인 수준에서 내 눈앞에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기준의 문제가 되니까요.

자, 바디우가 정치의 출발점으로 제시하는 적의 이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슈미트를 경유해 봅시다. 슈미트는 1922년 <정치신학>이라는 짧지만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합니다. 논문의 서문에서 그는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정치적 결정이라고 주장하지요.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정치적이라면, 결국 모든 것이 다 정치적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사유, 모든 판단, 모든 실천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입니다.

‘너희가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정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정치적이다’, 라는 도발적인 선언에 이어, 슈미트는 ‘주권’과 ‘결단’, ‘예외상태’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슈미트 역시 이전까지의 많은 정치철학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권력, 법과 질서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지만, 사유의 진행과 결과는 전혀 상이합니다. 각각 무제한적인 자유와 권리를 지닌 근대의 주체들이 갈등하거나 협력하고 투쟁하거나 타협하면서 국가와 법, 질서를 구성한다는 정치와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사유와 달리, 슈미트는 이러한 권력의 작동 이면에 존재하는 예외상태와, 그것을 구분하는 힘으로서의 주권, 그리고 주권의 발현으로서의 결단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내지요.

슈미트는 최상위 규범과 질서, 법의 규칙을 규정하는 궁극의 법으로서의 헌법에서조차 어떠한 귀속적 출발점을 발견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단순히 법이 준수되는 상황을 정상으로, 법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예외로 보는 것이 아닌 ‘어떤 법이 지켜지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의 상황이 근원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요. 그가 말하는 주권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이름입니다.

열차의 운행을 예로 들어볼까요? 개개의 시간표가 열차의 출발 시각이나 도착 시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일반적인 법과 질서에 해당한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규칙으로 만드는 열차의 운행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흔히 사람들은 열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하는 것을 정상으로,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거나 출발하지 못하는 것을 예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슈미트는 단순히 시간표와 열차 운행의 일치 여부가 아닌 열차 운행 그 자체, 열차와 철도의 운영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주권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야말로 상호불가침하며 배타적이고 단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는 협상이나 협력의 대상으로서의 옹호자나 반대자를 갖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권력 작용도 존재하지 않고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단순히 열차를 오 분에 한 대씩 운행하는 것이 좋은지, 십 분에 한 대씩 운행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반대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열차는 오 분에 한 대씩 운행하게 될 수도, 십 분에 한 대씩 운행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결정하는 권력 역시 진정한 의미의 권력이라고 볼 수 없고요. (슈미트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결정들은 궁극적이자 본래적인 의미에서 권력이라고 볼 수 있는 주권이 아닌 일상적인 의사결정에 불과하겠지요.) 진정한 의미의 반대자, 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차이는 열차의 운행 자체에 반대하는 것, 나아가 열차라는 실체나 개념을 전혀 공유하지 않고 공유할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슈미트는 이러한 차이에 비하면 시각표의 존재나 열차 운영과 시각표의 일치 여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요. 바디우가 언급하는 오늘날의 정치적 전통, 우리가 물려받은 불완전한 유산은 바로 이러한 적에 대한 사유를 의미합니다.

열차와 시각표의 사례에서 권력 이면의 주권이 드러나는 순간, 예외상태가 도래하는 순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파업이나 천재지변 같은 상황을 떠올릴 겁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예외상태로 이어지거나 예외상태를 촉발하는 기제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그 자체로 예외상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슈미트적 의미에 충실할 때도, 또 바디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요.

바디우에게 정치는 주체적이고 강한 활동, 새로운 진리들을 생산할 수 있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에서 이러한 역량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지속하는 익명들의 타협이 고작이지요. 뭐 낙관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느릿하게 더딘 진보를 떠올리거나, 비관적인 관점의 소유자라면 분주한 제자리걸음 정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정치인, 정당, 선거, 제도, 뉴스와 선전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지만, 바디우에게 이것은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상태의 지속에 불과합니다. 슈미트적 관점에서 정상과 예외를 구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거나 정당이나 선전 같은 것들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가 이것들에 국한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지요.

바디우가 오늘날 좌파의 난관을 언급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난관이라고 표현하지만 바디우는 사실상 좌파의 실패라고 보고 있습니다.) 바디우는 오늘날의 권력은 우리에게 그 권력이 모든 것을 매우 잘하고 있다고,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라고 믿도록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 반대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권력이 모든 것을 매우 잘 처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환상에 불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권력 역시 착각이나 선전에 불과합니다. 완벽하게 기능하는 권력이 불가능한 것처럼 완벽하게 정지한 권력 역시 가능하지 않지요. 이러한 관점은 몹시 타당한 것으로 보이고 또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권력과 정치에 대한 비판적 지평을 심각하게 축소하거나 폐기합니다. 바디우를 포함하는 유럽의 비판적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 외에는 어떠한 비판의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 최근의 경향 자체가 권력 작용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랄까요?

바디우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어의 초라한 반복과 정보의 빈곤을 용인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날 정치적 합의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합의의 결과에 따라 (세기말 유행처럼 등장했던 역사의 끝을 알리는 선언처럼) 주어진 가능성, 당장 손에 쥔 가능성 외에 어떠한 가능성도 남지 않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공포와 무기력의 혼합물보다 현존하는 권력에게 더 이로운 것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정치에 대한 비판은 고작해야 세금을 조금 더 낼 것인가 덜 낼 것인가, 장애인에게 지원금을 줄 것인가 도로를 확충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고요. 다른 가능성은 없다, 민주주의(와 지금의 제도)가 유일한 가능성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사적 소유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진 오늘의 국가가 국가와 사회의 유일한 형식이다, 라는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역사의 진보나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비판 역시 지엽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좌파가 빠진 난관이자 한계입니다. 당대가 안은 무수한 문제들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개량이나 (심지어 예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일시적인 처방에 몰두하는 것! (하지만 이 지점은 동시에 바디우나 그와 비슷한 이론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강력하게 비판 받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가능성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전망이나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이지요. 타르비 역시 정치에 대한 다소 낭만적인 접근이 아닌가 바디우에게 묻기도 하고요. 어려운 지점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바디우는 그가 속한 나라의 대혁명을 포함한 정치적 사건의 순간들을 종종 언급합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오늘로 돌아오지요. 그가 호명하는 사건의 역사에는 오늘날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순간들, 심지어 악하거나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는 선택의 순간, 오늘 돌이켜보면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당대에는 그야말로 불가능 그 자체였던 순간들이 존재했습니다. 대혁명부터 시작해 파리코뮌, 가깝게는 68혁명에 이르기까지요. 궁궐에서 광장으로 끌어내 왕의 목을 친다는 것, 노예가 주인과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것, 여성이 집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들이 이와 같지요. 바디우가 여전히 당당하게 자신은 코뮤니스트라고 밝히는, 우리 모두는 코뮤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가 종종 거론하듯 오늘날 바디우가 겨냥하는 불가능성의 끝에는 사적 소유와 이익에 기반하지 않은 관계의 구축에 대한 전망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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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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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는 이전 사건에 대한 충실성과, 그것에서 출발하는 비판을 강조합니다. 이전까지의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은 당대를 이루는 진리의 조건들을 직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현존하는 지배 질서가 사력을 다해 고수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엉뚱하게 헛힘 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엉뚱한 적을 만들어 놓고서는 허상에다 열심히 총질하는 꼴이지요. 대체로 자욱한 포연 때문에 상황은 좀처럼 명확하게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당대의 질서가 고스란히 지속한다는 점에서 불발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래된 격언을 상기한다면 좋겠지요, 왜 실패했는가?)

현실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전망 모두 당대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릇된 현실 인식에서 나오는 비판은 결국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없고, (소 뒷걸음질에 대한 가능성은 잠시 괄호에 넣어둡시다.) 오판에 기인하는 전망은 언제나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바디우가 충실성에 이어 강조하는 이전 사건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주어진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주 고전적인 의미, 고전적인 방식에서의 작업이지요. 바디우는 무엇보다 정치적 비판은 당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들의 체계가 결국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인류에게, 인류가 가진 역량에 걸맞는 어떠한 살아있는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굉장히 논쟁적인 생각입니다.) 자, 어쨌거나 오늘 밤은 바디우가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정치와 오늘날 우리가 정치에서 받은 유산인 적이라는 이념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정리합시다. 이 전통에 충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실하게 그 가능성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바디우는 이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다음 밤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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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3.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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