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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뭐 꼭 우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묻는 것은 왜 우리인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왜 철학인가, 하는 물음이니까요. 그러니 철학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누구여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을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겠지요. 철학은 오늘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대의 문제를 인문정신의 위기로 진단하고 철학에서 모종의 해답을 구하려는 시도는 철이 지나 어색해진 유행처럼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하고 상투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해답이랍시고 이런 진단에 이어 인문학 내지는 철학으로 포장한 상술이 은근슬쩍 고개를 내민다면 그런가, 싶어 갸우뚱하던 고개가 도리질로 이어지기 십상이지요. 전설에나 나오는 요순의 때가 아니라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고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돌이켜보면 사람 여럿 목숨 우습게 날아가던 시대도 실은 예사였고 허구한 날 먹는 걱정 굶는 걱정 어디 인간사에서 끊인 적이나 있습니까. 물론 인간사 본래 그렇다, 라는 식으로 당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시각은 퍽 미심쩍지만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운운하는 것도 썩 미덥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시대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문제니 위기니 운운하면서 시끌벅적 철학을 호명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무관심과 무시, 약탈만이 횡행합니다. 철학이라니, 요즘 시대에 그런 생각들이 가당키나 한가요, 원자보다 작은 물질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시대, 빛의 속도로 수억 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먼 우주의 끝자락까지 엿보는 시대, 돈만 있으면 계절과 장소를 떠나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소비가 가능한 시대에 당최 철학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나랑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약간의 취미, 지친 일상의 위안 내지는 마음의 안정을 제공하는 잠언 취급 정도가 보통이지요. 자, 보통의 상황이 이런 사이, 신시대의 학문들은 철학의 유산을 부지런히 제 주머니로 옮겨 담습니다. 사유 능력과 인식에 관련한 탐구의 자격은 뇌 과학과 인지과학이 가져갑니다. 생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호르몬의 작용과 뉴런의 활동으로 설명하지요. 인간 사회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이제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의 몫입니다. 뭐 철학이 자연과 물리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요. 문자 그대로 찬밥 신세입니다. 철학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시대는 잘만 흘러갑니다. 어쨌거나 흘러가지요.

사실 되짚어보면 어느 시대에나 철학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의 일화를 떠올려볼까요? 잘 알려진 것처럼 탈레스는 기원전 7세기 밀레토스에서 만물의 근원과 원리를 탐구했던 사람입니다. 흔히 그리스 철학이라고 하면 많은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떠올리지만, 플라톤에 앞서 세계의 근원과 원리를 묻고 탐구했던 자연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탈레스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요. 탈레스는 천체의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밤마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탈레스의 주변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을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를 쌓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늘 혼자 뭔가 생각에 잠겨 있거나 엉뚱한 별이나 쳐다보며 살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탈레스는 여느 날처럼 밤하늘을 보면서 걷다가 미처 발 앞에 우물을 보지 못하고 그만 빠지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본 지나가던 하녀가 그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지요,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겠다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정작 자기 코앞조차 보지 못해 웅덩이에 빠지다니.

오늘날 들었을 때는 그저 우스운 일화 정도의 느낌이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탈레스가 주위에서 받은 대접은 지금 우리가 체감하는 것 이상(?)이었을 겁니다. 노예가 주인을 공공연히 비웃다니요, 그것도 여자 노예가 말입니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여기저기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를 정도라면 탈레스가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가장 비천한 자들에게조차 조롱당하는 처지가 바로 철학의 기원입니다. 어디 탈레스뿐이겠습니까.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명목으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 받았고 데카르트는 사유의 기초로서의 확실성을 정초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고 곳곳에서 수차례 밝혀야만 했으며 인간과 사회를 억압하는 가상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의 작동 원리를 탐구했던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로 낙인 찍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공동체에서 가혹하게 파문당했고 니체와 하이데거를 향한 시선에는 여전히 나치의 악몽이 낳은 색안경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굳이 이들의 개인사적 불운을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걸핏하면 철학의 위기 운운하는 것이나, 운운하며 이들을 내키는 대로 재단하고 잘라내어 호명하는 것을 정작 이들이 듣는다면 코웃음 치며 논박하거나 숫제 들은 체도 안 할 겁니다, 아마.

다시 탈레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우물에 빠진 뒤의 이야기는 약간의 반전을 통해 탈레스의 명예를 회복시켜줍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받던 탈레스는 천체 운동의 관찰을 통해 기상 변화를 예측하고, 이듬해 작황을 예상하여 큰 이문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탈레스가 대단하다, 마냥 허투루 노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그를 다시 봤다고 하지요. 성격 급한 사람들은 여기서 ‘봐라,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철학도 얼마든지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남들보다 더 잘할 수도 있다’고 쉽게 교훈을 읽어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어딘지 조금 이상합니다. 아무리 ‘자연철학’이라고 하지만 굳이 기상과 작황을 예측해서 이문을 남긴 것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농경 사회에서 작물의 재배와 거래에 관련한 기술은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과학기술과 금융에 관련한 지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조금 경우가 다르지요. 탈레스가 철학자라고 해서 그가 가진 모든 생각을 다 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과학자가 하는 모든 활동은 다 실험입니까? 예술가는 밥만 지어도 밥이 다 예술입니까?

결국 철학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이렇게 난관에 부딪힙니다. 세상으로부터 조롱받던 최초의 철학이 멋지게 복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철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자리하고 있지요.

이제 맨 처음 우리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면 일단 철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철학이 도대체 뭘까요? 우리는 철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철학의 의미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누구는 철학이 위기라고도 하고, 아무도 철학을 하지 않는 시대라고도 합니다. 철학 어쩌고 하는 것들은 죄다 배부른 소리라는 야단스런 비난과 철학에서 답을 찾겠다는 이상한 법석이 함께 소란합니다. 소란한 가운데 세상은 철학 없이도 잘만 돌아갑니다. 우리 일상은? 뭐 마찬가지로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기 다반사고요.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을 배워놓느라 여기저기 죄송한 상황이 예사로 펼쳐지지요.

이 와중에 결국 철학은 언어와 논리의 사용에 관련한 전문적 지식 체계로 한정당하거나, 또는 애먼 허영심만 기웃거리는 철 지난 잡화점 신세로 전락한 것이 당대의 형국인 것 같습니다. 필요와 경우에 따라 철학의 영토는 필요한 사람의 입맛대로 이리저리 잘리고 붙여지기 일쑤이지요. 퍽 초라한 몰골입니다. 명목상으로나마 자연과 인간에 대한 모든 탐구 영역에서 주인 행세를 하던 옛 시절에 비한다면 망해도 이렇게까지 망했을까 싶을 정도지요. 앞으로도 당분간 사정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철학의 몰락은 등속으로 꾸준하거나 때때로 가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기 운운하며 철학이 자신을 반성할수록 철학이 지닌 한계와 문제만 점점 드러나고,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수록 언어와 논리의 전문성에 자신을 가두는 꼴입니다.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겠다고 대중을 향할 때면 그저 옳은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뻔하게 맞는 말로 전락하거나, 상술 뒤범벅에 엉망으로 재단 당한 이상한 꼴로 나타나기 십상이고요. 한사코 철학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철학에 어떤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어쩐지 과거의 영광에서 억지로 자긍심을 길어 올리려 애쓰는 몰락한 민족의 비가를 듣는 것 같습니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멋지면 멋질수록, 웅장하고 화려할수록 어딘지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것처럼요.

... (중략) ...

철학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사실 이미 오래된 질문입니다.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해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탐구를 개진한 바 있으며, 그 질문만을 정확하게 콕 집어서 다룬 접근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아예 제목으로 달고 있는 책도 꽤나 있을 정도지요. 들뢰즈나 러셀처럼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구들도 꽤 진지하게 고민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철학사의 탁월한 철학(자)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철학을 다시 묻고 정의합니다. 논변으로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으로 철학의 대상과 경로를 한정한 파르메니데스, 기하학처럼 연역적인 진리의 체계를 구축했던 스피노자, 사유와 경험으로 분단된 철학의 영토를 통합하는 칸트, 철학의 무대를 역사로 확장한 헤겔, ‘망치로 철학하기’와 ‘모든 가치의 전도’를 주장하는 니체, 기존의 철학이 망각한 존재물음을 시원에서부터 다시 던지는 하이데거, 철학을 개념으로 쌓아올린 건축에 빗댄 들뢰즈, 언어, 진리, 세계의 관계를 통해 철학의 영토를 새롭게 구획하는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생각들과 다양한 접근들이 있었지요.

자,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바디우가 있습니다. 바디우는 오늘날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을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학자’라는 표현은 그에게 그리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바디우는 진리, 사건, 주체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정치, 사랑, 예술, 과학이라는 네 가지 서로 다른 진리의 영역을 구분합니다. (연구와 강의로 급여를 받는 직업적 의미에서의 ‘학자’가 아닌, 주체의 유형으로서의 학자는 ‘과학’이라는 영역에 속하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방법이자 영역이라는 철학의 윤곽을 드러내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무엇보다 철학은 다른 질서를 제시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사유입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얼마간 아리송한, 철학에 대한 바디우의 정의를 언급하는 것으로 일단 이야기의 매듭을 지읍시다. 바디우는 철학은 무엇보다 시대의 진단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가 인간에게,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단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철학은 이런 동시대의 명제들에서 출발해, 진리 개념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디우의 시각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입장이나 동시대 주류 철학의 시각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한데, 이 역시 남은 밤 동안 함께 생각해봅시다. 마지막으로 철학은 참된 삶에 대한 실존적 경험이자, 앞선 진단과 구축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이 친구들 참 ‘삼위일체(trinity)’라는 사고의 틀을 좋아하는 것 같군요. 하긴, 바디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편으로 시대의 진단과 진리의 구축, 참된 삶이라는 세 가지 특징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바디우는 철학은 삶에서 출발해, 삶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거대한 동어반복에 불과한 걸까요? 행복을 주는 파랑새를 찾아 나섰다가 어디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사실 파랑새는 집에 있었고 파랑새를 찾는 과정이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따위의 동화 같은 교훈이 고작 철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일까요? 자, 어쨌거나 우리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 먼저 좋은 답을 찾는다면 알려주시면 좋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고민은 다음 밤으로 이어집니다.

2017. 1. 16.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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