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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Ch. 5


마지막 주제는 철학, 다시 철학입니다. 철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조차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 시간에 언급했던 것처럼 시대의 위기와 철학의 위기, 인문 정신의 위기를 슬쩍 묶어서 상품화하는 것도 해마다 돌아오는 봄꽃 노래 유행 같이 흔한 일이 되었고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판적 역량도, 역사를 읽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이나 통찰도 이제 더 이상 철학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전유물은 고사하고 낡은 간판 정도가 어울리겠군요, 배부른 고급 취미 내지는 허영에 눈 어두운 사람들만 붙들어 매는 불 꺼진 간판쯤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무 가혹한가요?

오늘날 철학은 세상 곳곳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다지는 것에 매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철학이라는 상품으로 영리를 꾀하는 똑똑한 상인들의 경우는 제외입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 생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문의 학문으로서 사유의 규칙 정도를 탐구하고 확증하는 것에 집중한다고 할까요, 이념의 척도로 세계를 재단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순순히, 그리고 조금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군요.

바디우는 이 와중에 고집스럽게 철학의 자리를 고수하고, 주장합니다. 단순히 사변적인 담론 체계나 학문의 규칙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세계와 관계하고 진리를 담지하는 철학을 말하면서요. 철학이라는 거대한 영역에 대한 자신의 기획을 밝히면서 바디우는, 철학의 중요한 기능으로 ‘동일화(incorporation) 작용’과 ‘공가능(compossibilité) 작용’이라는 두 기능을 먼저 지적합니다.

역자가 ‘동일화’라는 역어를 선택한 ‘incorporate’라는 낱말은, 흔히 무언가를 설립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종종 어떤 대상을 포함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개체를 포함하는 상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는, 그것을 포함해 어떤 조직을 이룬다거나, 합쳐진다는 의미를 지시합니다. ‘incorporate’의 어원은 라틴어 ‘incórpŏro’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 라틴어에서 이 낱말은 합체하다, 결합시키다, 가입시키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낱말이 포함하는 ‘córpŏro’라는 어근은 ‘합체’라는 역어에서 드러나듯, 대화의 후반부에서 바디우가 진리와 몸(corps)의 관계를 언급할 때 사용하는 ‘몸’, ‘corps’라는 낱말의 어원이기도 하지요.바디우가 철학의 기능으로 ‘incorporation’을 꼽는 이유, 그리고 역자가 이 낱말의 역어로 ‘동일화’를 선택한 까닭은 철학이 자신의 시대의 진리들을 구축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를 발명하거나, 단순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개념을 포착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진리들을 통합한다는 차원에서요.

바디우가 두 번째로 꼽는 철학의 기능은 공가능 작용입니다. 공가능성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디우의 표현을 직접 빌리자면 ‘진리의 상이하고 이질적인 영역들’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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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비와 바디우가 대담의 마지막으로 철학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두 사람 모두 철학에서 전달이라는 문제를 중요한 화두로 삼습니다. 타르비는 가장 일반적인 질문이라고 말하면서 철학자와 전달의 문제를 바디우에게 묻고, 바디우는 플라톤과 선의 이데아의 관계를 비교 검토하면서 타르비의 질문에 답하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그리고 타르비의 질문처럼) 모든 철학자는 진리와의 주체적 접촉에서 출발합니다. 진리와의 만남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지점이지요. 물론 그 가능성 자체가 특정 개인에게만 한정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진리와 경험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진리와의 조우는 철학자의 개인적인 지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지만, 정작 그 지점은 절대로 전달하거나 공유할 수 없는 의미와 내용으로 이루어진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다루면서 바디우는 <국가>에서 드러나는 플라톤의 입장을 언급합니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진리와의 접촉이라는)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필연성, 그가 접촉한 진리를 타인에게 전달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경험과 무관하다고 말하면서요.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정치가나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자들이 선의 이데아에만 몰두할 때, 그들은 오로지 선에 이데아에 머무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고 말하면서요. 플라톤은 단순히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해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그 경험을 사회 일반의 수준에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지배적인 의견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플라톤의 표현대로라면 추측과 ‘억견(doxa)’이 지배하는 세계만이 지속하는 것이지요.

사형을 선고받은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입니다. 정확하게 같은 맥락에서 바디우는 철학의 임무이자 역할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곳곳에서 강조합니다. 단순히 집단에서 다수를 이루는 생각, 필연적인 진리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우연한 현재의 지배 질서를 반영할 뿐인 사회적 기준에 단순하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 방편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요.

결국 철학이 제시하는 불가능성은 지배 질서에 대한 불가능성, 지배 질서가 주장하는 불가능성입니다. 지배 질서는 언제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고, 오로지 자신이 행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질서를 고민하는 모든 시도는 곧 타락에 다름 아니지요. 바디우는 기존의 질서와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것을 바로 타락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철학은 권력이 불가능이라 선언한 그 경계 너머에 새로운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은 사유하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요. 그가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정치, 사랑, 예술, 과학의 영역은 모두 당대의 진리에서 출발해, 당대의 진리가 불가능으로 선언한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진리를 확증했던 역사의 지층 위에 서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사건을 통해서요.

바디우의 마지막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도 잠시 숨을 고르면 좋겠군요. 대담의 마지막으로 바디우는 한 차례 더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이란 무엇인지 생각을 밝힙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무엇보다 자신의 시대를 진단하고, 동시대적 진리에서 출발하는 진리의 개념을 구축하는 것이자, 나아가 참된 삶에 대한 실존적 경험입니다. ‘이 시대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그것의 진리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물음, 그리고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답을 찾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찾고 있으신 중인가요? 바디우는 사실 이 세 가지 질문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말하는군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그렇듯, 생각은 다시 각자의 몫입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2. 27.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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