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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Ch. 7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연극으로 만들어진 대담이니까 일종의 최종장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트리옹이 다시 바디우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이 세계에 맞서 저항하는 구심점 가운데 하나를 구축할 수 있습니까?’

바디우는 이에 관련한 프랑스의 특수한 전통을 언급합니다. 바로 프랑스가 혁명의 나라인 동시에 거대한 반동의 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요.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계몽주의, 대혁명, 6월 혁명, 파리 코뮌, 인민전선, 레지스탕스, 68혁명의 나라입니다. 이름도 혁혁한 혁명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지요. 하지만 동시에 1815년의 왕정복고, 베르사유 조약, 페탱 정부, 알제리 전쟁의 나라이기도 하지요. 대혁명의 유산을 고스란히 날려 먹은 경험, 2차대전을 불러온 이기적인 협약, 나치에 협력해 자국민을 탄압한 정부, 야만적 식민지배와 학살의 반동 역시 함께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디우는 사랑이 이와 같은 역사의 두 힘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랑 역시 다른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상황과 역사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언급하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오늘날 사랑이 놓인 위기는 결국 사회 전반에 흐르는 반동적 경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디우는 진보와 희망에 대한 믿음이 빛을 일어가는 시대에 사랑이 의기소침한 사이 그 자리를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차지했다고 진단합니다. (사르코지는 이러한 상황의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대담이 2008년에 이루어졌으니 요즘에는 르펜 정도라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아직은 두 이름을 같은 저울에 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반동적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정황의 참고용 척도 정도라고는 볼 수 있겠군요.)

​바디우는 언제나 반동세력은 정체성에 관련한 주제를 들먹인다고 말합니다. '위대한 미국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백인이다!'라는 주장은 이민자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고,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위대한 민족이다!'라는 주장은 공동체 안에서는 조선족과 이주노동자들을, 바깥으로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배척하지요. 이렇겍 정체성을 주제로 자신의 안전을 주장하고 차이의 배제를 주장할 때 사랑을 필연적으로 위협받을 수밖에 없지요. 바디우는 우리의 공동체가 우리 모두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기하기 위해(무려 ‘사실’을 제기하기 위해!) 개인이 실천 가능한 층위에서 사랑을 보호할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물론 앞서 우리가 살펴봤던 것처럼 자기 정체성에 갇힌 사랑은 아니겠지요.

바디우는 온갖 고독을 넘어 세계의 모든 것과 함께 ‘포획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피하는 낯선 것의 갑작스러운 침입, 내일의 전망을 흐리게 만드는 불확실성이 현대성(modernité)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합리적 예측과 전망을 불가능으로 몰아넣는 사랑이야말로 현대성의 가장 큰 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의 사랑이 맞닥뜨린 당대의 운명일 수도 있습니다. 쉬운 사랑, 안전한 사랑, 모험이 없는 사랑, 위기에 빠질 염려가 없는 사랑은 ‘오늘날의 사랑’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새로운 유혹일지도 모르지요.

바디우는 이 난관 속에서도 가능한 둘의 진리로서 사랑, 둘을 견지하고 둘을 지속하는 사랑을 성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가 예찬하는 사랑의 본령은 여기에 있으니까요. 사랑의 선언이 사랑의 지속에 필수적이라면 선언과 지속을 위한 노력 그 자체를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회피하려는 상업적 쾌락주의와 지리멸렬한 대안들 속에서요.

… (중략) ...

사랑은 거의 언제나 순조롭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사랑에서 위협을 제거하려는 시도들은 이 난관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겨주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고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끝없이 그 사랑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사랑 때문에 어딘가에 묶이기도, 사랑 때문에 방랑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이 불협화음이야말로 사랑의 모순적 본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동시에 대상을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대상에 몰입하는 사랑은 동시에 그 대상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입니다.

다른 책에서 바디우는 사랑을 두고 힘겨운 ‘다리 절기(boiterie)’라고 언급합니다.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이 바로 이런 특징을 갖는다고 말하면서요. 다리 절기는 바로 불가능한 걷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리를 절면서 걷는 것은 걷는 것도 아니고 걷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걸음인 동시에 걸음을 금지하는 무엇, 그러면서도 앞으로 전진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완전한 걸음은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둘 사이에서 항상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나지요. 바디우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다리 절기야말로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동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항상 사랑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번민에 빠지고, 사랑에 즐거워하면서도 또 아파합니다. 사랑 앞에 놓인 이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지나면서 사랑을 지속하는 것을 바디우는 충실성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실성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충실한 마음이 아닌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자세를 의미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의 주체’로 만듭니다.

사랑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 절뚝거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뚝거림을 감내하는 노고의 질서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피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국 사랑을 회피해 버리지요. 바로 여기에 바디우가 주목하는 사랑의 가치가 있습니다. 절름대는 걸음이 이내 빠지고 마는 위기, 절뚝거리는 걸음이 만드는 피로는 항상 사랑에 대해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대해 사유할 것을 요구 받는 것이지요. 대부분 고민과 번뇌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사유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민과 번뇌의 사유는 비판과 부정을 향하기 쉽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유에 더 가깝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사유를 필요로 하고, 나아가 그 자체로 사유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의 무대에서 다리를 절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둘의 무대를 유지하면서 다리 절기를 지속하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 피로한 노정을 견디는 것. 너무 가혹한 일일까요? 하지만 이 위험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삶과 세계를 직시하는 방식입니다. 안전한 관계,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의 위협을 모두 제거한 관계들은 진짜로 가능할까요? 어쩌면 안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낯선 위협 앞에서 고개만 덤불에 처박고 안전하다고 믿는 타조처럼 당장 눈앞에서만 위협을 지우려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위선과 자기기만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으로요.

사랑을 예찬하는 바디우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도, 아니면 고개를 갸우뚱 젓거나 숫제 절레절레 흔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한바탕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사랑이 무엇이 되었든 아직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어떤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쩌면 사랑은 삶의 작은 동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동력들에 의해 세계의 귀퉁이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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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3.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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