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김은희, 캐롤 길리건: 정의 윤리를 넘어 돌봄 윤리로


캐롤 길리건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발달심리 이론을 연구한 미국의 심리학자입니다. 애초에 길리건이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기존의 이론이나 입장들과 특별한 관련을 맺고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변호사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길리건은, 유복한 환경에서 다양한 인문예술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학부에서는 문학을, 석사과정은 임상심리를 전공했고요.

잠깐 보부아르와 비교해볼까요? 앞서 살펴본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대체로 많은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입장이나 이론적 관점은 직간접적인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연관이 있습니다. 보부아르 역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청소년기를 겪으면서 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부모의 의미는 단순히 나와 의견이 다른 개인이나 친권자로서의 부모가 아닌 기존의 사회질서가 갖는 규범적 강제력을 의미합니다. 즉 여기에서의 갈등은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보부아르와 여성에게 대학 진학 대신 결혼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 사이의 갈등, 철학을 전공하려는 보부아르와 여성에게 철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전통과의 갈등, 자신만의 직업을 갖기를 희망하는 보부아르와 여성은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견과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많은 여성은 억압과 차별과 편견 아래 놓일 수밖에 없고, 자연스레 그것을 체화하거나 혹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페미니스트적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리건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그녀가 주로 활동했던 1980년대의 미국 사회는 보부아르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랐으니까요. 물론 여성에 대한 묵시적 차별이 어느 때고 완전히 없었겠느냐마는 적어도 대학을 진학하고 직업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진입 단계에서부터 ‘여자가 무슨 대학을!’ 이런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었지요.

길리건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 연구를 시작했다기보다는 연구 과정에서 기존의 주류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경험적 사실들을 발견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 연구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적 가치에 주목하게 되었다고요. 그럼 어떤 경험적 사실들을 발견했기에 자연스럽게 여성적 가치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발전했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길리건은 1964년 하버드에서 사회심리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1967년 하버드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발달심리 분야에서 당대의 가장 저명한 학자였던 로렌스 콜버그 교수의 연구진으로 들어가지요. 길리건의 연구는 콜버그의 이론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길리건의 문제의식을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콜버그의 이론부터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콜버그는 프랑스의 심리학자 피아제의 발달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심리발달, 특히 도덕에 관련한 인식의 형성과정을 분석한 학자입니다. 콜버그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에 관련해 인간은 총 여섯 단계의 과정을 거쳐 발달한다고 합니다. 1단계는 처벌과 복종의 단계(obedience and punishment driven)입니다. 이 단계에서 개인은 외부의 규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부정적인 자극을 피하기 위해 외부의 규칙에 수동적으로 복종합니다. 2단계는 도구적 상대주의의 단계(self-interest driven)입니다. 이 단계에서 개인은 자신의 이익계산에 근거해서 외부의 규범을 조건부로 준수합니다. 콜버그는 여기까지의 단계는 ‘관습 이전의 수준(pre-conventional stage)’이라고 분류합니다.

3단계는 선의와 상호동조의 단계(good intentions as determined by social consensus)입니다. 이 수준에 이르러서 개인은 비로소 단순한 규칙 이상의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즉 ‘무언가를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만 단순하게 판별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발달 과정에 있는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주로 아동기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초적인 처벌에 의한 강제나 자기중심적인 이익계산에 의해서만 판단하던 아동이 이 단계에 이르면, 관계를 중심으로 규칙을 판단하기 시작니다.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생각해볼까요? 식당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뛰어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말한 상황을 예로 들어봅시다. 콜버그의 이론에서 3단계에 도달한 아동은 이러한 요청 앞에서 단순히 매를 맞기 싫어서 말을 듣는다거나 얌전히 있으면 식당에서 나올 때 사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부탁이기 때문에 이 규칙에 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사적관계의 친밀성을 중심으로 외부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4단계는 귄위와 사회유지의 단계(authority and social order obedience driven)입니다. 외부의 규칙을 사적관계 이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단계이고요. 식당에서 엄마 뿐 아니라 다른 손님들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를 맞거나 사탕 때문이 아니라, 또 엄마의 요청 때문이 아니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구성원들이 따르고 있는 규칙을 자신 역시 지키는 태도를 갖는 것이지요. 콜버그는 3, 4단계의 수준을 ‘관습 수준(conventional stage)’이라고 분류합니다.

5단계에 이르면 개인은 외부의 규칙, 즉 관습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에 진입합니다. 단순히 규칙의 존속이나 질서의 유지 이상으로 규칙과 질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지요. 규칙 그 자체로서의 법 뿐만 아니라 법을 만드는 민주적 절차 등까지 함께 고려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사회계약적 단계(social contract driven)라고 볼 수 있습니다. 6단계는 보편윤리적의 단계(universal ethical principles driven)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개인은 법적 차원을 뛰어넘어 보편윤리의 수준에서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판단하고 단순히 외부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넘어 스스로 도덕의 규칙에 따라 결단을 내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콜버그는 5, 6단계의 수준을 ‘관습 이후 수준(post-conventional stage)이라고 부릅니다.

콜버그는 인간의 도덕적 심리 발달에 있어서 이러한 여섯 단계의 과정이 필수적이며, 중간에 과정을 생략하거나 건너뛸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테면 처벌에 의해서 외부 규범에 복종하는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규범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그리고 단계를 지날수록 도덕적으로 더욱 발달한 심리상태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즉 1단계에서 6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은 인간이 성장하는, 발달하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지요. 콜버그는 여러 경험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논증하고 정당화합니다.

길리건의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콜버그의 연구진 소속으로 여러 임상연구를 진행하면서 길리건은, 어떤 판단에 있어서 충분히 도덕적으로 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여아가 콜버그의 척도에 따르면 3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를 수차례 발견합니다. 다른 지적 능력에서 비슷한 수준을 갖춘 남아의 경우는 6단계 수준의 판단을 내리는 반면에 말이지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에 비해 대체로 도덕 발달이 더디거나 낮은 수준에 머무는 것일까요?

인간의 도덕심리 발달 과정을 해명하고자 하는 콜버그의 이론이 특별히 남녀 간의 성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도덕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성차를 주장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길리건은 콜버그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했을 때 통상적으로 남아에 비해 여아의 발달 수준이 더 낮은 단계로 측정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혐의를 근거로 이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지요. 최초로 콜버그가 이론을 정립할 때 사례로 연구했던 표본이 남아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는 사실과, 콜버그의 이론이 인지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충분히 발달해 있다고 느끼는 여아들의 심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길리건은 자신의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11세 남아 제이크와 13세 여아 에이미를 대상으로 ‘하인즈 딜레마(Heinz dilemma)’라는 실험을 진행합니다. 상황은 간단합니다. 하인즈의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치료제를 약국에서 구할 수는 있지만 하인즈는 약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어요. 이때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약을 훔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두 아이에게 주어졌습니다.

제이크의 대답은 훔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돈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면서요. 왜 생명이 돈보다 소중한지 재차 묻자 제이크는 약사는 나중에 돈을 다시 벌 수 있지만 아내가 죽는다면 하인즈는 그녀를 다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요. 길리건이 다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자 모든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에이미의 대답은 조금 다릅니다. 에이미는 훔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필요한 돈을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하는 방식을 통해서요. 에이미는 아내가 죽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인즈가 약을 훔쳐서도 안 된다고 대답합니다. 길리건이 이유를 묻자 약을 훔치면 당장은 아내를 살릴 수 있겠지만 그 결과 하인즈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아내가 다시 아플 경우 아내를 도울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약을 훔칠 게 아니라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에이미의 생각입니다.

콜버그의 구분에 따르면 제이크의 판단은 무려 6단계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법질서를 지키는 것을 넘어 경제적 가치와 인간의 생명이라는 가치를 놓고 비교하고 자신의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있으니까요. 반면 에이미는 3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덕적 가치를 추상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 관계만을 중심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길리건이 보기에는 에이미는 도덕적으로 덜 발달한 것이 아니라 돌봄(care) 중심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서 절도라는 폭력도 불사하는 제이크와 달리, 에이미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길리건은 제이크가 상황 속의 사람들을 모두 독립된 개인으로 설정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반면, 에이미는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문제를 바라본다고 해석합니다.

이밖에도 길리건이 이 실험을 적용했던 다른 대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질문 앞에서 클레어라는 여대생은 하인즈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을 훔쳐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생명과 돈이라는 추상적 가치의 비교가 아닌 하인즈의 아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제시합니다. 클레어는 법이나 사회계약에 대한 도덕의 작동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콜버그의 이론에 따르면 이미 관습 이후 수준에 도달한 상태라는 뜻이지요. 콜버그의 이론을 단순하게 적용했을 때 클레어의 이러한 판단은 오히려 퇴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리건은 클레어의 판단은 관계적 사고를 법적 관계 이상으로, 사회적 관계 전체로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퇴행이 아닌 진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길리건은 여성들의 관계 중심적 자아관과 도덕관은 돌봄의 윤리(ethic of care)를 지지하고, 독립성과 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의 자아관과 도덕관은 정의의 윤리(ethic of justic)를 지지한다는 귀결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윤리의 이러한 두 특징은 단순히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거나 상호배타적인 방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있어 모두 필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지요.

한편 길리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 역시 존재합니다. 혹시 돌봄의 윤리라는 것은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내지는 일종의 기만 장치 같은 것은 아닐까? 여성이 본래 그러한 특성을 지녔다고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역할을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종속적인 역할에 알맞게 사회가 여성에게 그런 덕목들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여성적 가치라는 덕목 아래에서 여성의 희생과 여성에 대한 착취가 더욱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돌봄의 윤리에 해당하는 여성적 덕목들은 하루빨리 벗어 던져야 하는 대상이 되겠지요.

길리건 자신 역시 이러한 의심을 품고 연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경험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즉 여성적 가치가 반드시 여성 자신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착취로 이어지지 않는 발달 경로를 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임신중절에 관련한 여성의 심리 발달 과정 연구를 통해 이를 입증하고요. 이에 따르면 돌봄의 윤리라는 발달 경로에서 여성이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부정하는 과정을 거칠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자기성실성(personal integrity)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돌봄의 윤리 역시 자기 희생적인 윤리가 아니라 여성 자신을 포함해 관계 안에 놓인 모두를 돌보는 윤리라고 볼 수 있겠고요.

평등이라는 이념을 생각해볼까요? 정의의 윤리가 평등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방법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기준 앞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세우는 방식입니다. 콜버그가 예시하는 롤즈처럼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앞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처럼요. 반면 돌봄의 윤리는 모든 사람을 ‘나처럼’ 생각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나와 모든 타인이 균형에 도달하는 지점이라고 할까요? 흥미롭게도 길리건이 돌봄 윤리가 단순히 여성의 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과정에서 발견한 자기성실성이라는 개념 역시 콜버그가 예시한 롤즈의 실험과 비슷한 맥락에 놓이는 것 같습니다. 롤즈의 사고 실험의 핵심은 ‘자신의 인종, 성별, 나이, 신체적 특성, 교육 수준, 재산의 정도 등 모든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기준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채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답할 것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콜버그의 이론은 독립성을 기반으로 고도로 추상화된 기준을 통해 사고한다는 점에서 롤즈의 생각과, 길리건의 이론은 자기성실성을 잃지 않은 가운데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롤즈의 생각과 닿는 것으로 보입니다.

… (중략) ...

길리건에 따르면 정의의 윤리와 돌봄의 윤리는 결국 인간이 동시에 도달해야 할,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상태입니다. 길리건은 기존의 심리학이 정서적 성숙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독립과 애착이라는 두 개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정서적 독립을 성숙한 것으로, 어딘가에 애착을 가진 것을 미숙한 것으로 보는 기존의 심리학을 비판하면서요. 특히 정서적으로 독립한 남성과 그가 이루는 사회적 성취를 곧 개인의 성숙으로, 주변의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의 특징은 미숙한 인간상으로 바라보는 문화적 특징에 문제를 제기하지요.

길리건에 따르면 남성도 여성도 모두 종국에는 독립과 애착을 모두 갖게 됩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결국 기존의 심리이론이 제시하는 하나의 발달 경로, 하나로 규정된 노선을 따라서 인간이 성장한다는 관점입니다. 길리건은 정의의 윤리에 대해 돌봄의 윤리라는 새로운 차원의 접근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들을 남성의 윤리, 여성의 윤리라고 이분법적으로 못 박으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집필한 <다른 목소리로 In a Different Voice>라는 책의 제목처럼 길리건은 당연하게 보편이라고 여겨지는 주장들과 다른 ‘다른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이지, 반드시 ‘여성의 목소리는 남성과 다르다’거나 ‘다른 그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녀의 주장 역시 ‘여성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입니다.

길리건은 흔히 약자에게 부여되는 과업이나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한, 부차적인 덕목으로만 여겨졌던 돌봄의 윤리를 그 자체로 정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여성적 윤리(feminine ethic)’와 ‘여성주의적 윤리(feminist ethic)’을 구분하면서요. 여성적 윤리는 가사노동과 같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강요되었던 덕목을 가리킵니다. 가부장적 사회는 돌봄을 여성의 본성과 연결시켜 그것을 여성에게 강조하고 여성에게만 그것을 강제합니다. 이때 여성은 돌봄이라는 명목 하에 끝없이 희생을 요구 받지요. 하지만 여성주의적 윤리 아래에서 돌봄의 윤리는 돌봄을 단순히 여성에게만 속하는 여성적 덕목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윤리로 바라봅니다.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돌봄까지 포함하는 차원에서요.

길리건은 추상적이고 초연한 독립적인 자아, 그리고 논리적 판단과 원리적 사고를 중심으로 한 정의의 윤리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목표이자 성숙한 인간의 표상으로 제시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관계 속에서 타인과 연결된 자아, 타인과 자신을 모두 포함하는 돌봄,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한 돌봄의 윤리를 제안합니다. 돌봄 윤리가 정의 윤리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정의 윤리를 대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정의 윤리 중심의 사고방식만으로는 인간의 도덕 발달 과정을 해명하는 것에도, 또 윤리의 구체적 실천에서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두 윤리가 공존해야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길리건은 여성주의 이론가로서 연구를 출발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도 문학을 전공하던 시절 자신이 접했던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가부장주의에 대한 표현들을 읽어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요. 그녀에게 여성주의라는 자각을 일깨워준 것은 콜버그의 연구진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여아들, 혹은 여성 면접 대상자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이론에 따른다면 이들은 도덕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고, 이런 자각이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에 있어 길리건이 주목하는 대상은 바로 목소리입니다. (앞서 이리가레는 남녀간 성기의 차이에 주목한 바 있지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여성은 침묵하거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엉뚱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요. 목소리의 특징은 무엇보다 반향되고 공명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목소리는 응답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는 점차 침묵으로 바뀌지요. 목소리가 인격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명이라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빗소리나 꽹과리 소리 같은 무기물의 파열음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공명을 얻지 못하는 목소리, 응답을 받지 못하는 목소리, 이미 침묵에 익숙해진 목소리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의 진정한 가치와 위력은 페미니즘에서의 ‘여성’이 단순히 성별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가 은폐하거나 소외시킨 모든 이름의 대명사라는 점에 있다고 이야기 나누었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길리건이 제안하는 ‘다른 목소리’ 역시 이 사회가 감춘 모든 익명의 목소리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11. 22. / 콘텐츠코리아랩

info@labyrinthos.co.kr

#라비린토스 #labyrinthos #돌봄윤리 #김은희 #페미니즘 #캐롤길리건 #CarolGilligan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