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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현, 샌드라 하딩: 포스트모던 입장론의 변화와 한계


지난 밤 이리가레를 다루면서 그녀의 사상을 줄곧 따라다녔던 ‘본질주의’라는 비판을 언급한 바 있지요. 사실 본질주의라는 비판은 근대 이전의 거의 대부분의 철학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일종의 낙인과 같은 비판입니다. 모종의 초월적 차원을 전제하는 철학, 경험으로 확증할 수 없는 선험적 원리를 전제하는 철학은 사실 그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면 전체 사상이 송두리째 기각되고 만다는 한계에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이리가레 역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의 고유성, 그리고 신체의 차이에 따른 성차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출발합니다. 이리가레의 사상이 만들어진 성이라는 보부아르의 주장이 외면했던 여성 고유의 특징에 주목하고 그것의 가능성과 가치를 되살렸다는 성과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성차를 왜 반드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신체 유형에 국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썩 매끄러운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요.

‘신체의 구분에서 성차를 연역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이리가레는 암묵적으로 ‘그렇다’고 전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성차,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의 차이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자둥동체나 양성구유, 또는 상황에 따라 성이 변하는 생물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간혹 양성구유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리가레의 관점은 설령 그녀의 전제에 동의한다 치더라도 객관적 사실 탐구로서의 학문이 아닌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의 확장, 즉 ‘인간주의’라는 또다른 본질주의와 맞닥뜨리고 맙니다. 또 ‘성을 반드시 신체에 종속된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피할 수 없지요. 지난 시간에 짧게 이야기 나눈 것처럼 결국 그렇기 때문에 성차를 긍정하는 페미니즘의 입장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둘의 차이가 아니라 LGBTQIA… 등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성차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이리가레에 대한 비판, 또는 이리가레가 촉발한 논란은 결국 ‘성차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성차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의 판단 근거, 즉 실재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이어지지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지식을 참이라고 판단하고 어떤 종류의 지식을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과정이야 복잡할 수 있지만 결국 핵심은 지식이 지식의 대상의 실재와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일 것입니다. 자연적 실재에 대한 구분은 비교적 수월합니다. 예를 들면 ‘물이 100℃에서 끓는다’라는 지식은 ‘물’을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화합물로 정의하고, ‘100℃’라는 상태는 섭씨온도 표준계에 따라 설정한 뒤, ‘끓는다’라는 술어의 의미를 ‘물’의 상태가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이라고 정한다면 쉽게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경우에 따라 표준기압 설정 등의 세부조건을 부연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진술의 진위를 경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와 같은 지식은 어떻습니까? 사회학은 앞서 예시한 진술과 같은 사회 현상이 자연과학이 다루는 자연적 실재처럼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믿음을 토대로 사회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수행합니다. 뒤르켐은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Les Règles de la Méthode sociologique>에서 ‘개인 외부에 존재하며 개인에게 강제적 힘을 부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감정의 양식’이 실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들은 표상과 행위로 구성되기 때문에 생물학적 현상과 뚜렷하게 구분되며, 특정 개인에게, 특정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현상과도 다르다고 주장하지요.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들에게 광범위한 지배력을 갖는 바로 이 행위와 사고와 감정의 양식을 ‘사회적 실재’라고 합니다. 사회과학은 이 사회적 실재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학문 영역이라 할 수 있고요.

19세기 후반 사회학이 본격적으로 탐구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뒤, 명시적으로 사회학이라는 간판을 사용했든 사용하지 않았든 이 사회적 실재를 다루는 탐구가 광범위하게 등장했습니다. 뒤르켐이나 막스 베버, 넓은 범위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나 프로이트의 연구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는 대체로 큰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자연과학 역시 함께 발달하고 탐구의 방법을 정교화하면서, 결국 ‘과학’과 ‘실재’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회적 실재를 다루는 연구가 20세기 중반 이후 근대성 비판과 인간중심주의 비판에 치중하면서 과학적 인식에 대한, 과학의 객관적 토대에 대한 광범위하게 비판하면서 이러한 차이는 점차 도드라지지요.

이러한 차이는 결국 1990년대 ‘과학전쟁’으로 폭발합니다. 포스트모너니즘 논쟁으로도 불리는 이 갈등은 과학의 객관성과 실재성을 둘러싸고 그것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실재론자들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구성주의자들 사이의 극명한 입장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새삼 젊은 학자들이나 재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 붙은 적이 있었는데, 이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살펴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요.)

과학전쟁의 핵심은 연구자의 개인적, 사회적의 특성과 연구 결과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있습니다. 실재론자들은 과학적 탐구야 말로 지적 활동과 그 결과물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과학이 탐구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도출하지 못한 경우는 과학적 탐구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은 일부 ‘나쁜 과학’이나 ‘실패한 과학’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것을 구실로 과학 자체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지요.

반면 구성주의, 특히 오늘 우리가 다룰 하딩이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입장론(standpoint theory)의 지지자들은 과학자 역시 그가 속한 사회적 힘들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과학자’여도 마찬가지지요. 이에 따르면 과학의 보편성이란 결국 지배 계급, 인종, 성별, 문화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성이며, 심지어 과학은 보편을 구실로 이러한 배제를 타당한 것처럼 제도화하는 작용까지 수행할 때도 있습니다.

하딩은 페미니즘에 관련한 입장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과학은 세상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생산함과 동시에 정치적인 정보를 생산하며, 과학적 지식은 진보적 성향과 퇴행적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딩은 과학적 지식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독법을 제안합니다. ‘지식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하딩은 과학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과학학(social studies of science)’, 특히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필요성을 제안하지요.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의 과학 비판은 ‘나쁜 과학(bad science)’을 비판하는 것과 ‘정상과학(normal)’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과학적 탐구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성차에 관한 가치중립을 지키지 못하는 일부 과학을 비판하는 것을 요체로 하고, 후자는 모든 지식은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상황 속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성차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하는 현행 질서에서 만들어지는 과학적 지식, 즉 정상적인 탐구라고 여겨지는 활동 전체를 비판합니다. 당연히 ‘더 좋은’ 방식으로, ‘더 잘’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젠더 이슈를 다룰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요.

전자의 관점을 통상 페미니스트 경험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연구자가 가진 성차별이나 남성중심적 가치관 같은 사회적 편견을 제거하면 중립적인 탐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여성의 과학적 참여가 중요한 것은 여성 과학자가 젠더 이슈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기존의 편견을 덜 공유하며 그만큼 과학의 객관적 규범을 준수하기 용이하기 때문이지요.

후자의 관점은 페미니스트 입장론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든 연구자는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지니고 있으며, 연구자가 어느 위치에 있든 그 자리 또한 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의 참여적 가치관이 오히려 연구 결과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연구자의 사회적 정체성이 연구 결과의 신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에 따르면 여성의 과학적 참여가 중요한 것은 여성이 중립적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성차별주의를 내재화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차이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어떤 관점이 더 타당한 것 같습니까?

하딩 역시 다른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연구를 거듭하며 초기 입장을 조금씩 개선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입장론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초기에 하딩이 주로 과학에서 여성이 갖는 특수한 위치를 강조했다면 뒤로 갈수록 점차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확장해서 적용합니다. 즉 페미니스트 연구자란 단순히 여성이거나 여성의 경험을 공유하는 연구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삶의 위치에서 기꺼이 연구를 시작하려는 자세를 갖춘’ 연구자를 의미하며, 과학자로서 이들이 갖는 입장은 ‘단순히 여성의 경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집단의 경험이 산출하는 상식과 그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들을 상대화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페미니스트의 관점이란 사회적으로든 선택적으로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인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 됩니다. 무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은 성취하는 것이라고요!

또한 후기로 갈수록 하딩은 사회의 여러 관계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성에서 벗어나 여성 집단 내부에서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페미니스트 과학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성의 삶에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합니다. 이러한 입장은 자칫 ‘여성의 삶’을 ‘모든 여성’의 삶으로 단순화시켜 환원할 위험을 안고 있지요. 그래서 하딩은 ‘모든 여성들의 삶’에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여성 집단 내부에서도 계급, 인종, 성적 정체성 등 기존의 수많은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할 테니까요. 이러한 하딩의 관점은 결국 서로 다른 입장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 차이들이 상호 교차하는 일상에서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보이지 않게 은밀히 작동했던 권력을 발견하고 타자들의 삶이 처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아갑니다. 기존의 보편 담론이 축소하거나 외면하거나 은폐했던 여성의 문제에서 출발해 페미니즘이 타자 전반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본격적인 지평을 확보한 셈입니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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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보르헤스를 인용합니다. 푸코가 인용한 보르헤스는 중국의 어떤 백과사전을 인용하고 있지요. 그 백과사전은 동물을 이렇게 분류합니다, 황제에게 속하는 것, 향기로운 것, 길들여진 것, 젖을 잘 먹는 돼지, 인어,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 방목하는 개, 미친듯이 소란스러운 것, 셀 수 없이 많은 것, 낙타 털 붓으로 그린 것, 방금 항아리를 깨트린 것, 멀리서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것 등으로요.

푸코는 처음 이 분류를 보고선 웃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물을 분류하는 기준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요. 거의 분류라고 보기도 어려운 수준이지요.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 (이 경우에서라면) 특히 생물학이 제시하는 분류와는 비교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과학의 분과에서 생물학이 제시하는 생물 분류의 기준 역시 늘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서구 지성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제시했던 생물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생물은 유혈동물과 무혈동물로 우선 나뉩니다. 그리고 유혈동물은 다시 태생, 난태생, 난생, 불완전 난생으로, 무혈동물은 불완전 난생, 저생 혹은 자연발생, 무성생식 또는 자연발생으로 나뉘지요. 중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 분류는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된 기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생물을 분류하는 ‘진리’로서 기능한 것이지요.

오늘날 ‘종속과문강문계’로 이어지는 분류 체계는 18세기 린네에 의해 비로소 등장합니다. 최초의 린네 분류계는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어류, 곤충류, 연충류의 6개 강으로 이루어진 동물계와, 암술과 수술의 개수와 배치를 기준으로 24개의 강으로 구성된 동물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광물 역시 생물로 간주하여 4개의 강으로 이루어진 광물계를 제시했지요. 물론 오늘날에는 린네가 제시한 분류 체계는 기본적인 방식만 사용할 뿐, 최초의 분류 체계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광물계가 생물에서 탈락한 것을 포함해 많은 내용들이 바뀌었지요.

푸코는 이러한 근대적 인식의 구성 과정을 추적하며 자신의 연구를 ‘고고학’이라 명명합니다. 옛 유물과 사적을 통해 해당 시대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사회상을 복원하는 고고학처럼, 옛 시대의 인식과 지식을 상세하게 살피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사고방식을 복원하면서요. 이 과정에서 푸코는 중요한 통찰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단순히 원시적인 수준의 지식이 점차 정교하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식들 사이에 근본적인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푸코는 진리로서의 지식을 생산하는 인식의 구조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을 개척합니다. 이에 따르면 진리는 대상에서 즉각적으로 연역되거나 자연에서 객관적인 방식을 통해 그 자체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는 일종의 인식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푸코의 탐구는 하나의 지식이 어떻게 진리의 위상을 획득하는가에 대한 탐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로서의 학문, 객관적 과학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이지요. 푸코의 통찰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 모두가 결국 그것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산물, 혹은 그 구성원들이 공유한 일종의 공리(axiom)로서 기능한다는 주장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극단적인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종의 ‘진리를 낳는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요. 푸코는 이러한 진리의 구조를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하고, 결국 진리의 발생과 기능은 이 에피스테메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오늘날 푸코의 통찰은 이미 ‘한물간’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20세기 후반 ‘과학전쟁’의 결과는 일단 과학의 보편성, 즉 진리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진영의 판정승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전쟁 후 결과는 더 처참합니다. 논쟁이나 논란, 학문적 갈등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과격한 표현에 걸맞게 과학의 보편성을 문제 삼았던 거의 대부분의 입장은 거의 패전국과 같은 상태인 것으로 보일 정도지요.

하지만 학문과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실천의 영역, 일상과 사회와 정치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과학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무엇이 진리로서 기능하는가’라는 물음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젠더 이슈가 그렇지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것들이 사실 전혀 당연하지 않다라는 주장은 우선 만연한 성차별과 성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는 유용한 준거점이며, 나아가 젠더에 관련해 근본적인 보편적 합의를 모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여성 역시 실존적 주체로서 타인의 시선이 강제하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보부아르부터 출발해, 여성의 정체성은 일종의 진공상태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갖는 고유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지나 ‘인식의 진공상태’가 과연 가능한지, 혹은 그것이 가상이라면 그것에 만들어지는 인식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다루는 하딩까지 일단 도착했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는 다음 밤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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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5. / 콘텐츠코리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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