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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영, 뤼스 이리가레: 성차의 존재론과 수평적 초월


보부아르는 ‘만들어진 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전까지의 페미니즘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단순히 현존하는 질서 안에서 여성의 권익 신장이나 차별 철폐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현행 질서 자체를 비판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부아르의 주장은 현대적 의미의 페미니즘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영향은 양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에 동조하는 사람만큼이나 광범위한 비판 역시 불러일으켰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생산적인 논쟁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고, 페미니즘 역시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이념 지향으로 확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에게 제기된 대표적인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 성으로서의 여성, 만들어진 성으로서의 여성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여성성의 인정’을 주장하는 입장과 ‘여성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입장으로요. 첫 번째 입장은 보부아르가 여성이라는 성의 차이를 부정할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담당했던 역할을 폄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부아르가 여성 해방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실존적 인간은 사실 (실존주의) 철학이 이상적으로 그리는 남성상이라고 주장하지요. 이들은 보부아르의 주장이 실은 모두가 남성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바라봅니다.

두 번째 입장에 따르면 보부아르가 비록 여성을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그녀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녀 자신 역시 여전히 사회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여성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요? 이들은 보부아르가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토대로 젠더 이슈를 다룬다는 점, 이성애라는 성애의 특성을 무비판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을 근거로 이러한 비판을 제기합니다.

보부아르에서 출발했으니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가 봅시다. 프랑스의 철학자 이리가레는 위의 두 입장 가운데 전자의 특성이 도드라지는 관점의 소유자입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성차,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성의 차이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지요. 한때 이러한 주장은 본질주의로 몰려 ‘너덜너덜’해지도록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여성성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다는 점, 주체와 타자라는 단순한 구도에서 벗어나 ‘여성적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의 유형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전환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이리가레는 먼저 서구의 자기중심적이고 단일성에 기반한 남성 주체가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구축해왔는지 제시하고, 남성 주체의 관점에서 절대적 타자의 자리에 위치하는 여성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합니다. 이리가레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검경: 여성으로서의 타자 Speculum: De l’autre femme>에서 프로이트에서부터 출발해 플라톤까지 소위 철학의 ‘아버지’들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혹은 이들이 만들어낸 가부장적 관념 위에 서구 사회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남성 주체의 특징은 무엇보다 성차에 무지한 주체, 성차를 무시하는 주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주체들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경합하거나 갈등하는 관계, 경합과 갈등의 결과에 따라 한 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다른 성은 억압의 대상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 성차에 무지한 주체와 이 무지로 인해 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무엇의 관계로 파악합니다. 즉 단순히 남성 주체가 여성 주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주체의 관점에서 여성은 아예 보이지 않게, 망각되는 것이지요. 단일성을 전제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여성은 마치 무생물인 사물과 같이,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이리가레는 서구의 전통에 속하는 모든 철학의 기초에는 성차에 대한 무관심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무관심(indifférence)은 차이의 배제, 무차이(in-différence)로 이어지고요.

보부아르와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보부아르는 만들어진 성, 사회적 성으로서의 여성성(과 그것의 특징들)을 비판하고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주장합니다. 이리가레의 관점에 따르면 ‘실존적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단성적인 서구의 지적 전통에 속하는 것이지요. 서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과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관념 모두에 대항하여 이리가레는 성차를 복원할 것을 주장합니다. 실존적 인간이라는 동일성 위에서 주체적 인간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서구 전통이 망각하고 은폐했던 여성이라는 성차에 입각해 대안적 주체상을 제시하면서요.

이리가레는 남성과 여성은 한 성이 다른 성으로 환원되거나 예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가 주체이면서 서로에게 타자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단일하고 유일한 남성적 주체성에서 등가의 가치와 존엄성을 갖는 두 주체들의 관계로 이행하는 것이 철학과 정치학의 과제라고 진단하지요.

여성이라는 새로운 주체 유형의 도래는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기 저작에서 이리가레는 먼저 여성들 간의 관계를 강조하지요. 가부장적 사회는 무엇보다 남성의 성, 남성적 주체성, 남성적 세계 질서 위에서 작동하는 사회를 의미합니다. 성이 주체로, 주체가 경험세계로, 경험세계가 다시 사회의 구성과 존속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미의 계승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종의 계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즉 가부장적 사회는 무엇보다 남성성에 기반한 가부장적 질서가 남성에 의해 남성에게로 계승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은 절대적 타자, 차이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일한 대상들의 집합의 위상에 처합니다. 따라서 먼저 여성들 간의 차이에서 출발해 가부장적 사회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여성만의 상징체계, 여성의 언어, 문화, 종교, 이론들을 창조하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후기 저작에서 이리가레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전기 저작에서 ‘여성’이라는 차이를 밝히는 것에 집중했다면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여성의 문제를 여성성 내부에서 다루기보다는 이미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 특히 남성과의 관계에서 다루지요. 절대적 타자였던 여성이 새로운 주체로 발돋움했다면, 자연히 기존의 주체인 남성과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이들의 관계는 사르트르가 타자 전반에 대해서 가졌던 관점처럼 인정투쟁에 기반한 관계가 될 수도,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환대하는 주체들의 관계가 될 수도 있지요. (물론 후자의 관계가 도래하는 것은 이리가레고 페미니즘이고 뭐고 쉬운 길은 아니겠습니다.) 이리가레는 단순한 권력관계나 주체와 타자의 자리를 거듭해 교환하는 변증법적 관계가 아닌 다른 성에게 종속되거나 굴복하지 않으면서 차이를 지닌 둘로 존재하는 관계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역시 그리 쉽게 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자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후자의 과제도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을까요? 이리가레 자신 역시 ‘남성성과 다른 고유한 여성성의 계보를 쌓아나가는 것’, 그리고 ‘다른 성에게 종속되거나 굴복하지 않으면서 차이를 지닌 둘로 남는 것’의 어려움을 모르지는 않았겠지요.

이를 위한 방법으로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적 언어, 언어의 시적 사용입니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언어란 단순히 의사표현의 수단이나 정보전달의 수단이 아닙니다. 언어에는 인간의 존재 양식, 인간의 사유,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들,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이리가레는 역사에서 언어 역시 단일한 주체의 언어로만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 주체가 사용하는 언어는 자신의 관점에서 대상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이지요. 이러한 언어는 타자와의 소통(communicate with)이 아니라 타자에게 무언가를, 특히 주체가 의도하는 하는 바를 전달하는(communicate to) 언어입니다. 이리가레는 시적 언어를 통해 지시와 전달에 기반한 관계를 소통과 공유에 기반한 관계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언어는 개인에 선행합니다. 개인이 혼자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고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고의 경로와 산물에 있어 경악할 만큼 압도적인 단독성을 드러내는 사례들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 역시 언어의 규칙 자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언어를 문화적 산물로 보는 관점에서도, 언어에서 단순한 기호나 의사소통의 수단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언어에 그 고유한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에서도 언어는 공통의 것입니다. 즉 언어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무엇으로 여기든, 사회적 구성물로 여기든 언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통의 것으로 존재하고 공통의 것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아주 예외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언어의 영역이 바로 시입니다. 시의 언어는 언어의 규범, 공통의 규범을 따르지 않습니다. 공통의 규범을 따르는 시도 있겠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시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지요. 공통의 규범에서 벗어난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지만 이 규범에서 벗어난 시는 언어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시는 언어의 규범이 아닌 오로지 시적 주체의 규범에 속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시는 언어 규범의 확장과 변용에 작용합니다. 언어 규범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고 규범에도 작용하지요. 그래서 사고 규범에 따라 만들어지는 사회 규범과 삶의 양식에도 작용합니다. 매개항이 늘수록 작용의 함수는 변하겠지만, 그럼에도 시는 언어와 인간과 사회를 두드리는 강력한 작용제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공통의 규범에 입각해 맞는 말과 틀린 말로 언어를 구분합니다. 문법의 규칙과 사고의 규칙에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시는 오로지 시의 규칙, 즉 그 자신의 규칙만을 따르지요.

그래서 시의 언어는 고유한 소유자, 시의 언어를 소유한 사람을 갖습니다. 시를 소유한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면, 시인은 무엇보다 기존의 규범이 아닌 자신의 규범으로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행하는 규범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규범을 따르는 사람을 새로운 주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 시인, 시적 화자, 시적 주체는 기존의 주체 유형과 다른 독특한 주체의 위상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이리가레는 여성의 고유한 특징에 기반한 여성의 고유한 계보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 계보의 등장인물은 무엇보다 여성적 주체, 절대적 타자로서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차이가 제거되거나 은폐된 주체가 아닌 차이의 주체, 차이를 간직한 주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자, 이런 차이의 주체, 그리고 이 주체가 만들 수 있는 관계의 유형을 시를 놓고서 같이 생각해봅시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전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김선우, ‘얼레지’)

구구절절 의미를 따지고 들면 굳이 시를 읽는 재미가 줄어드니까 (하지만 그래도 또 따지고 드는 것 역시 시 읽는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겠지요, 우선은 넘어갑시다.) 우선은 우리 맥락에만 집중해봅시다. 이 시에서 쾌락을 바라보는 남성과 여성의 관점은 극명하게 나뉩니다. 시에 등장하는 남성의 관점에서 쾌락은 대상과 분리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누구를 생각해야만’, 그것을 내게 주는, 줄 수 있는 대상에 의해서만 쾌락은 가능하지요. 하지만 여성 화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시적 화자는 ‘벌과 나비가 없어도 봉오리가 열리는 꽃’처럼 대상을 매개하지 않은 관계, 순수한 쾌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요. 어디 바깥에서 요란한 바람이 없어도 ‘대궁의 (대궁은 줄기를 의미하는 ‘대’의 방언입니다.) 격정’만으로 풀잎은 눕는다고 유쾌하게 덧붙입니다. 자, 하나 더 봅시다.

당신이 나를 당신의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면

나는 아이의 얼굴이거나 노인의 얼굴로

영원히 당신의 곁에 남아

사랑을 다할 수 있다

세계의 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살아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은 당신의 소년을 버리지 않아도 좋고

나는 나의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세계의 방들은 온통 열려 있는 문들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 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 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버리지 않는다면

(하재연, ‘안녕, 드라큘라’)

때로 좋은 시는 현실태를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고스란히 보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직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언가의 가능태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의 모습을 현실에 구현한다는 점에서 모종의 예외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현실태의 온전한 보존’이라는 것 자체가 범인의 일상적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역시 예외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시는 하나로 결합하지 않는 둘,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서로의 소년과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은 관계, 우리를 낳는 우리의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관념과 이미지라는 시적 상태, 은유적 상태로 가능성의 틈새를 엿볼 수 있을 뿐이지만, 소년과 소녀가 각자의 차이 위에서 서로가 서로임을 증명하는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평을 얻었다고 할까요?

이리가레는 새로운 (여성적) 주체성과 시적 언어로 여성을 절대적 타자로 전락시키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은 남습니다. 이리가레가 새로운 주체 유형에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과 달리, 플라톤은 새로운 주체, 차이를 간직한 주체는 오히려 주체들 간의 관계를 해체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시의 언어가 결국 시적 주체의 고유한 규범을 따르는 언어라고 본다면 공동체와 사회의 가능근거이자 최소한의 공통의 것인 언어의 의미 역시 사라지거나 퇴행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중략) ...

오늘날 지배적인 주체 유형, 이기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주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성차가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여지가 크지요, 아주. 대안적 주체는 꼭 여성적 주체여야 하는가? 남성성과 구분되는 여성성이 또 하나의 주체적 특성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성차는 대안적 주체에게 필수적인가? 등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현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성차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 단일한 척도 위에서 가치의 양적 비교만을 허용하는 사회의 결과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 남성과 동등한 권력, 동등한 자본을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여성들, 나아가 타자보다 월등한 권리, 타자보다 강력한 권력, 타자보다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여성들도 있지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목표와 성취 자체를 단순히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초창기 페미니즘이 지향했던 이런 목표는 점점 갈 곳을 잃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취를 통한 자연소멸이 아니라, 성취에 동반하는, 그 성취가 유발하는 부작용 때문일 것입니다. 기존의 주체성, 권력지향적인 남성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여성들은 그렇지 못한 여성들을 점점 더 심각한 폭력과 예속 상태로 몰아넣는 것에 일조하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취가 더 선명하게 도드라지기 때문일까요?

이리가레가 남성과 다른 여성의 주체성을 제시한 것도 어느새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군요. 그 사이 남성, 여성을 넘어 ‘LGBT’가 등장했고, 이제는 그 뒤에 ‘QIA’까지 붙었습니다. 동성애, 양성애, 도착성애, 성전환, 퀴어, 간성애, 무성애까지 등장한 것이지요. 물론 이들의 존재론적 위상이나 사회적 처우 등은 아직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인용한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셈이지요. 말하자면 이들의 자리는 아직 흔들리는 상태에 있다고 할까요? 물론 이러한 진동은 때론 누군가에게 불편을, 또 사회적인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마드는 균열에서 기존의 질서가 방치했던 맹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곳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습니까? 흔들리는 자리는 그저 남들 일에 지나지 않습니까?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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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8. / 콘텐츠코리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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