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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entation: 성평등을 주장하는 이름은 왜 여성주의인가?


알버트 먼셀이라는 화가를 아십니까? (간혹 ‘문셀’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먼셀은 1858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1918년 브루클린에서 사망한 미국의 화가입니다.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는 주로 바닷가 풍경 등을 그린 작품 약간을 남겼지만 썩 훌륭한 성취를 이뤘다거나 그리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먼셀의 작품은 아메리카 대륙의 장대한 자연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당시 전형적인 미국의 화풍을 벗어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썩 훌륭하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아닌 사업가, 또는 연구자로서의 먼셀은 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먼셀 색체계(Munsell Color System)’를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먼셀은 색조(hue), 명도(value), 채도(chroma)라는 색의 3속성을 토대로 색을 분류하는 방식을 고안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3차원 공간의 한 점에 이 세 가지 속성을 대응시키고 관찰자의 시감에 따라 색의 체계를 분류하는 방식이지요. 먼셀이 고안한 색체계는 (먼셀의 사후에 일부 수정이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합니다.) 오늘날까지도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색의 분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색 분류 체계도 먼셀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1964년 한국의 국가기술표준원(당시 기술표준원)은 먼셀의 색 분류표를 따라 한국에서 통용되는 색채에 대해 색을 분류하는 기준과 색의 명칭을 지정합니다. 이른바 ‘한국표준색표’를 제정한 것이지요. 흔히 사용하는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보라, 분홍, 자주, 청록 등의 기본색 이름을 지정하고, 기본색만으로는 충분히 다양한 색상들을 지칭할 수 없으므로 ‘선명한’, ‘흐린’, ‘탁한’, ‘밝은’, ‘진한’, ‘연한’ 등의 수식어를 덧붙여 색의 이름을 정하는 방식입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색의 명칭을 ‘계통색 이름’과 ‘관용색 이름’으로 구분합니다. 계통색은 색상, 명도, 채도의 세 속성을 중심으로 색채를 분류한 이름이고, 관용색은 한국 사회에서 색을 지칭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을 가리킵니다. 대추색, 카키색, 겨자색, 국방색, 꽃분홍 등이 관용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관용색의 이름 가운데 대표적인 표현으로 ‘살색’이라는 명칭이 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지만 여전히 일상에서는 사용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지요. 요즘에는 ‘살색’이라는 표현이 그리 바람직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수도 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 살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대략 어떤 색을 가리키고자 하는지 쉽게 떠올릴 수 있지요, ‘관용적으로’요.

한국 사회에서 ‘살색’이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추방된 것은 2002년의 일입니다. 2000년 11월 한 시민과 외국인노동자 등이 ‘특정인종의 피부색과 유사한 색상의 명칭을 살색이라고 표기한 것은 인종차별 행위’라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고, 1년 뒤 국가인권위는 이 표현에 평등권 침해의 소지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국가기술표준원에 색 명칭의 개정을 권고합니다. 기술표준원은 이를 받아들여 살색의 명칭을 연주황으로 변경했고요.

여기까지만 놓고 봤을 때에도 ‘그럴 수 있다’, ‘바람직한 개정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변화에는 사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살색이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이 크레파스나 색연필, 물감, 색종이 등의 어린이 교보재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변화는 어린이들이 무심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칠하던 ‘살색’을 의심 없이 사람의 피부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의 살을 지닌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습니다. 인종이나 평등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나 인식조차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니 만큼 효과를 갖는다는 표현보다 이에 관련한 인식의 밑바탕이 된다는 표현이 차라리 정확할 정도로요.

이후의 일은 더 재밌습니다. 오늘날 ‘살색’의 정식 명칭은 ‘살구색’입니다. 2002년 기술표준원은 인권위 권고에 따라 해당 색의 명칭을 ‘연주황’으로 변경한 뒤 또 한 건의 진정이 인권위에 날아듭니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색상의 명칭을 어른들도 잘 모르는 한자어로 변경한 것은 어린이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는 내용의 진정이었지요. 진정인은 6명의 초등학생, 중학생들이었습니다. 진정서는 ‘살색을 연주황으로 고친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담당자’를 차별 행위자로, ‘대한민국 어린이들’을 차별 피해자로 명시했습니다. ‘어른들도 잘 모르는 한자로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크레파스와 물감의 색 이름을 지정한 것은 어린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이 진정서의 요지였지요. 인권위에서 이 진정이 받아들여지면서 ‘살색’의 명칭은 다시 ‘살구색’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있었던 ‘살색 논란’은 이렇게 일단락되었고요.

해외에서도 백인 중심의 ‘skin color’, ‘skin tone’을 비판하는 시위나 홍보 활동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의 ‘살색’에 대응하는 표현인 ‘skin color’는 주로 백인의 피부색을 가리키는 표현이지요. 당연히 피부색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게 얼마나 타당하냐는 물음은 잠시 옆으로 밀어둔다고 해도, 백인이라고 해서 색 분류체계의 바로 그 ‘백색’은 아닐 것이고 같은 백인이라고 해도 다 똑같은 백색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피부색이 있습니다. 때로 편의상 피부색과 같이 특징적인 요소나 유전적 차이 등을 사고의 기준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한 사회 내에서 그것이 보편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순간 그것에서 배제되는 대상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발생할 소지는 다분합니다.

피부색에 관한 긴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오늘날까지도 가장 뿌리 깊은 불평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문제의식이 숨어있기 때문이지요. 피부색을 기준으로 개인이나 집단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사고를 ‘인종주의(racism)’ 또는 ‘인종차별주의’라고 합니다. 문자적 의미대로라면 ‘인종주의(race + -ism)’라고 옮기는 것이 본래 의미에 가깝겠지만, 인종을 중시하는 관점은 결국 인식과 행위에 있어 인종을 기준에 둔 차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주의는 주로 백인을 중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인종이든지 기본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속한 사회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마련이지만 인종차별은 유독 백인 집단, 특히 근대 유럽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 현상이지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반드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지극히 단순한 유아적 사고의 전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노력해도 벗어나거나 극복하기 어려운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것이 타인과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 그리고 차별이 빚는 직간접적인 폭력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겠지요.

어쨌거나 흔히 인종차별주의가 백인을 중심으로 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의미한다면, (유색인종이라는 표현 자체가 백인을 중심에 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것을 ‘인종차별반대주의(antiracism)’라고 합니다. ‘흑인주의’나 ‘유색인종주의’가 아니라요. 백인우월주의로서의 인종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흑인주의를 주장하거나 황인주의와 같이 표현도 어색한 낱말들을 기치로 내거는 것은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일입니다. 정교한 정치이론이나 사상에 기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요, 하나의 집단을 중심으로 한 차별의 부당함을 비판하기 위해서 굳이 다른 집단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A라는 우세집단으로 인해 B라는 집단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차별과 불평등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A 때문에 B가 손해를 보고 있으니까 B를 도와주자’ 내지는 ‘B를 차별하다니 A가 나쁘다’라는 식의 접근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관점은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단순히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갈등, 또는 우열을 가리는 분쟁으로 덮어 가리기 쉽기 때문이지요. 대결을 부추기고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이러한 접근은 사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고착시키는 경향을 갖습니다. 인종차별에 관해서라면 백인을 중심으로 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것, 백호주의의 반대말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것이지, 흑인주의나 황인주의가 아닙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불평등의 문제를 집단 간 갈등의 문제로 탈바꿈시키고 정작 해결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덮어 가리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제 우리 주제를 살펴봅시다. 흔히 페미니즘, 혹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에는 공통적으로 성과 관련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이에 기인하는 사회 제도들이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부당한 압력을 가하도록 작동하는가를 비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남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즘이 보다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그것이 여성과 여성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작용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생각들,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던 관습과 제도들이 어떻게 여성을 타자화하는지, 혹은 어떻게 여성의 시각과 목소리를 배제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가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지자가 늘어나는 만큼 페미니즘의 적대자 역시 함께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사람들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릴수록 이에 대한 오해 역시 함께 늘어난다고 할까요? 오늘날 페미니즘을 둘러싼 가장 일반적인 오해와 편견, 다시 말해 페미니즘의 비판이 겨냥하는 ‘여성’이라는 타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아닌 ‘페미니즘’ 그 자체에 대한 오해와 편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것의 이름에 관한 오해입니다. 이를 테면 페미니즘이 사실 은밀한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냐는 의혹이지요.

페미니스트임을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아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둘러싼 의심과 오해가 끊이지 않는 까닭은 아마 복잡하게 얽혀 있겠지요. 일차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냥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의 관성에 대한 경로의존성일 수도 있겠고요. 남성중심적인 세계에서 수혜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남성들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페미니즘(이라고 자처하는 주장들)이 쉽게 차별 행위자로 전제하는 남성들 역시 수많은 차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차별의 주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젠더를 둘러싼 주장들은 수많은 이유에서 연유하는 오해의 중층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대체로 오해의 층을 보태면서요. 쌓이는 오해를 따라 갈등도 함께 늘지만 늘 진짜 문제는 좀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인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문제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언제나 문제의식을 당대에 맞게 다시 묻는 것, 그리고 문제의 근원을 사유하는 것에서 출발하니까요.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이론적 지형이 존재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동등함에 초점을 맞추고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가 하면, 서로 다른 두 성이라는 차이에 초점을 맞춰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요청하기도 하지요. 어떤 페미니즘은 ‘두 개의 성’이라는 전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도식 자체가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면서요. 이러한 주장은 성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자연적 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보편 집단으로서의 남성과 그 여집합으로서의 여성이라는 타자 집단이라는 구분에 기반하고 있다고 접근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성 정체성에 관련한 문제에 있어 필연적으로 억압과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지요. 또한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과 여성의 삶, 혹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넘어 현대 사회의 윤리와 정치, 경제 등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페미니즘은 ‘여성’에서 출발하지만 여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적인 것(feminine)과 여성주의적인 것(feminist)을 구분합니다. 여성주의가 다루는 것이 단순히 여성적인 것을 초과한다는 뜻이지요. 때로 여성주의가 여성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여성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그것이 다루는 대상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라는 이름의 의미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때의 그 ‘여성’이라고 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보편’이 배제하는 타자의 고유명사, 기존의 권력관계에서 은폐되는 것들의 대명사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단순히 남성의 대립항(counter term)이 아니라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과 이들이 다루는 문제들, 이들 사이의 관계들을 천천히 살펴봅시다.

... (중략) ...

2014년 하이데거에 관련한 모종의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습니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었지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하이데거는 나치에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혐의의 상당 부분은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내용들이지요. 하이데거라면 두말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대 철학의 가장 탁월한 성취로 꼽는 위대한 지성입니다. 하지만 나치에 관련한 혐의로 인해 종전 후 죽을 때까지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지요. 하이데거는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며 나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표현을 수차례 발언합니다. 취임 전후에도 비슷한 발언들이 있었고요. 나치 집권기 동안 독일의 다른 지역, 기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재직했던 대학 역시 유대인 학생이나 교수들을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시대가 시대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기에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총장이라는 직책이 갖는 책임과, 하이데거라는 거대한 이름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가 않지요, 그래서 이에 대한 혐의에 대한 의심과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종전 후 하이데거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이나 주장을 표명한 적이 없습니다. ‘당혹스러운 침묵’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말을 아꼈어요. 1966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슈피겔이 이 문제를 집요하게 되물었지만, 하이데거는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관련한 자신의 정치적 오류에 대해 인정할 뿐 자신이 나치에 협력했을 당시 가졌던 정치적 견해나 철학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요.

2014년 출판된 하이데거의 책 한 권이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문제가 된 저작은 하이데거가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자신의 내면이나 생각들을 정리한 수기, 그러니까 일종의 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기록입니다. <검은 노트 Schwarze Hefte>(The Black Notebooks)라는 제목의 이 책은 출간 즉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적인 성향과 나치에 대한 지지가 수기의 곳곳에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너도 나치였군!’ 하는 의심이 짙어진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하이데거를 비판합니다. 하이데거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뒤섞인 혹평이 쏟아져 나왔지요. ‘역시 하이데거는 속으로 나치에 적극 동조하고 있던 것이 아니냐’부터 시작해 ‘철학 자체에 내재한 폭력성’, ‘철학에 침투한 나치즘’에 대한 비난과 성토까지 줄줄이 뒤를 이었고요. 이에 대한 신랄한 서평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증거 자료(?)의 등장으로 하이데거와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 한창일 때, 지젝은 이러한 논란 자체를 비판하면서 관점의 전환을 제시합니다. 무려 ‘왜 하이데거가 범죄자여서는 안 되는가?(why Heidegger should not be criminal?)’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요.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가 있는 지젝인 만큼 이 원고 역시 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전쟁범죄와 나치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하이데거가 나치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물론 지젝이 단순히 하이데거를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나치에 관련한 하이데거의 혐의는 이미 상당 부분 드러난 바 있으며 하이데거의 일기장에는 의혹에 대한 직간접적인 증거들이 수두룩하니까요.

하지만 하이데거의 혐의를 발견하는 것, 하이데거의 사상과 전쟁범죄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것, 혹은 이러한 혐의를 근거로 철학사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문제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사실 너무나 쉬운 일이지요, 혐의를 발견하고 단죄하는 것, ‘나치 협력자? 폐기합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요. 지젝에 따르면 언제나 쉬운 해결책은 가까이에 있지만, 쉬운 해결책은 언제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문제는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문제를 잘못 설정하면 언제나 잘못된 해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것, 서둘러 사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올바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나치와 하이데거에 관련한 상황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그의 혐의가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이데거처럼 비상하고, 탁월하고, 진정으로 인간의 문제를 고민한 철학자가 어떻게 나치에 동조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 ‘근대문명이 만든 인간 소외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여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과 실현을 주장한 철학자가 어떻게 유대인의 절멸에는 찬성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같은 문제는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진짜 문제를 감추는 거짓 질문들, 쉬운 해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문제는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꿔가며 언제든 다시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이데거에 앞서 1914년 독일의 지식인들은 ‘93인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선언문은 1차 대전에 관련한 독일의 책임을 부정하고 독일의 군사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언문에는 ‘하나의 문명국가로서 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내용과, ‘괴테와 베토벤, 칸트의 전승을 지키며 그것을 우리 양심과 가정에 신성하게 간직할 것’이라는 구절도 등장하지요.

이 선언문에 서명한 당시 독일의 학자들 가운데 뢴트겐도 있습니다. 생소한 이름인가요? 뢴트겐은 불투명 물체를 투과하여 미지의 방사선을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과학자입니다. 오늘날 의료, 산업기술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이 방사선의 이름은 바로 ‘엑스선’, ‘X-ray’이지요. 뢴트겐이 처음 이 방사선을 발견했을 때 그것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까닭에 미지수를 가리키는 ‘x’라는 기호를 그것의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많은 과학적 업적이 그러하듯 이 방사선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딴 ‘뢴트겐 광선’이라는 이름이 함께 붙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엑스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뢴트겐 광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뢴트겐이 ‘93인의 선언문’에 동의하며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제명이랄까요, 뢴트겐이라는 이름이 과학계에서 꺼림칙한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1차 대전, 그리고 선언문이 채 잊히기도 전에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킵니다. 오늘날에도 2차 대전은 완전히 종결한 사건, 이제는 지나간 역사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를 둘러싼 논란이 그러했듯이요. 앞서 언급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문제를 탐구하지 않은 채 쉬운 미봉책을 반복한다면 계기만 주어진다면 문제 역시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젠더에 관련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을 둘러싼 차별과 편견을 발견하는 것, 쉬운 일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아주 광범위하게(!) 찾을 수 있지요. 차별과 편견 속에서 차별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 누군가의 편견을 지적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습니다. 당사자를 단죄하거나 변호하는 것, 피해자가 있다면 그를 연민하거나 돕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차별과 편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도를 바꾼다면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드니까요. 많은 사람이 쉬운 해결을 고집하는 동안 정작 진짜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채 되풀이됩니다.

페미니즘의 중요성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우나 불평등을 개선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야 한다는 뜻이지요. 페미니즘은 현존하는 편견과 차별을 비판하기 위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서요. 그래서 차별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도처에 자명한 불평등을 왜 직시하지 못하는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편견이 있다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은 그것의 기원과 구조를 밝히는 일일 테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10. 25. / 콘텐츠코리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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