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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자정을 갓 넘긴 시각, 강남역 인근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그러니까 살해를 당했다고 볼 수 있지요. 지난해 한국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약 28만 명에 달합니다. 사고, 질병, 범죄, 노령 등 이유도 제각각이지요. 이 가운데 직접적인 살인에 의해 사망한 사람의 수는 대략 천 명 가량입니다. 체감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매년 죽고, 그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직접적인 살해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셈이지요.

어쩌면 그날 밤의 죽음 역시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였을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조금 특별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바로 이 죽음이 야기한 논란 때문이지요. 죽음에는 각각의 이름이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는 병사, 사고로 인한 죽음에는 사고사,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죽음에는 돌연사, 나이 많은 사람이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면 호사, 탁월한 성취를 이룬 젊은이의 죽음에는 요절, 까닭은 알 수 없는 죽음에는 의문사라는 이름이 따라붙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죽음에는 살인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언어가 세계를 구획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각각의 죽음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름을 갖지만, 이날 밤의 죽음은 사정이 조금 복잡합니다. 바로 죽은 사람과 죽인 사람의 관계 때문이지요. 이날 죽은 사람은 20대 초반의 여성이었고, 그녀를 죽인 사람은 30대 중반의 남성이었습니다. 이 남성은 범행 장소인 강남역 인근 노래방의 남녀공용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좌측 흉부를 네 차례 칼로 찔렀고, 피해 여성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9시간만에 범행 현장 인근에서 이 남성을 검거했습니다.

이 남자가 체포 직후 경찰에서 한 진술과 경찰의 조사결과 발표에서부터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것이 단순한 ‘살인’이냐, 아니면 ‘묻지마 범죄’냐, 또는 ‘여성혐오 범죄’냐 하는 논란이지요. 이 남성은 경찰에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해왔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을 진술합니다. 실제로 그가 범행에 앞서 화장실에 숨어 있는 동안 여섯 명의 남자가 화장실을 다녀갔지만, 그가 범행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일곱 번째로 화장실에 들어왔던 여성이었지요. 경찰은 조사 결과 그의 정신질환 진단서와 진료 기록, 약물 복용 이력, 청소년기부터 보였던 이상행동, 피해망상의 증거, 범행의 우발성 등을 토대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범죄’라는 결론을 발표합니다.

이 사건의 성격을 ‘여성혐오 범죄’로 볼 것인가, 아니면 경찰의 발표처럼 ‘묻지마 범죄’로 볼 것인가를 두고 많은 의견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논란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점차 불어나 사회적으로 크게 번졌고, 살인사건 치고는 이례적으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요. (수많은 죽음, 또는 살인 가운데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는 죽음은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경찰의 판단처럼 범행 동기와 방법, 범인의 병리적 특성, 검거 상황 등 사건의 외적 특징에만 의미를 국한한다면 ‘묻지마 범죄’라고 볼 수도 있겠고, 범인이 진술한 것처럼 살인의 기저 원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여성혐오 범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건의 내용과 사건의 당사자를 뚜렷하게 분리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 사건이 촉발한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논쟁은 곧 한국 사회에 여성혐오가 실재하느냐 아니냐는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만약 논란이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성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몇 가지 부당한 처우 정도였다면 성별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이든 은연 중이든 적극적이든 마지못해서든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기 때문에 사정은 역시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여성들이 삶에서 느끼는 감각과 남성들이 느끼는 감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지요. 신체적인 이유든 사회적인 이유든 모두 다르긴 마찬가지입니다. 유년기의 경험부터 각자의 나이까지 살아온 경험에 이르기까지, 속한 집단과 성별, 연령에 따라 당연히 경험과 경험에서 얻는 느낌들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처럼 짧은 시간 동안 가파르게 변화한 경우라면 이러한 차이는 더욱 극명할 테고요.

이 문제를 두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중심으로 다양한 의견이 오갔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논란에는 이미 자신의 주장과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뛰어들기 마련이고, 각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각자의 얘기를 수용해주는 사람하고만 이야기를 주고받기가 쉽습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 각자의 경험만 가지고서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 ‘한국 사회 어떻다’를 늘어놓으니 개중에 어떤 주장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지만,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외면 당하는 경우 역시 많았습니다. 다른 한편 공감에 기댄 주장은 문제 제기 자체는 할 수 있더라도 어떤 종류의 당위나 필연을 도출하는 것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법도 경험만큼이나 제각각입니다. 그러니 논란은 계속 어떤 되돌이표를 반복할 수밖에 없겠지요.

모종의 죽음이 야기한 논란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젠더 이슈를 다루는 수준이 크게 성숙했다거나, 제도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논란은 지금으로선 한국 사회가 ‘젠더 이슈’에 얼마나 무감각한가, 혹은 무감각했는가를 드러내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는 사실 정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어쨌거나 예전에 비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이는 요즘입니다만, 사실 성평등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에 초점을 맞춘다면 페미니즘(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사상이나 이론)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불합리한 제도나 인식을 개선해서 여권을 신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여기에 불평등이 있다, 우리는 평등을 원한다’ 내지는 ‘여기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자유를 달라’ 정도로, 즉 자유나 평등에 대한 주장만으로도 충분히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요컨대 자유주의나 기본적인 인권, 또는 합리적 형평성에 대한 약간의 감수성만 가지고도 충분히 여성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거입니다.

진짜 문제는 조금 더 아래에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은 여성에 대한 편견 뿐만 아니라 여타의 수많은 편견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를 테면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해야지’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은 ‘애들은 애들답게 공부나 할 것이니 어른한테 무슨 말대꾸야’와 같은 편견, ‘장애인이 무슨 운동을 한다고 그래’와 같은 편견, ‘요즘 젊은이들은 고오생을 안 해봐서 하나같이 게으르다’와 같은 편견, ‘사내자식이 뭐 그런 걸로 징징 거리고 그래’와 같은 편견 등 온갖 종류의 편견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편견은 그가 다른 편견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무비판적으로 함께 만들어진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한국 사회에서 편견의 대상이 되는 온갖 집단 가운데 여성에 대한 편견이 불편할 정도로 유별난 편이긴 합니다만, 굳이 정확한 표본과 통계가 없더라도 여성에 대해서만 유별난 편견을 가진 사람보다 그냥 온갖 대상에 대한 편견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남성에 대한 편견, 어린이에 대한 편견, 노인에 대한 편견, 껌둥이에 대한 편견, 빨갱이에 대한 편견, 고양이에 대한 편견, 아이폰에 대한 편견까지 온갖 종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이러한 편견에 기인하는 차별과 불평등의 철폐는 ‘건전한 상식의 증진’이나 ‘사회적 합리성의 증대’와 같은 보편적인 구호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혹은 ‘생각하라!(sapere aude!)’는 칸트의 격언이나, 어떤 규칙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즉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을) 고찰하는 롤즈의 이론 정도로도 충분히, 초과해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지요.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임을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는 명목 하에 페미니즘이 여성의 우월함이 아니라 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현대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는 것, 사회적 부조리와 불합리한 제도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설파하지요. 이들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해서 더 나은 사회,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당연히 맞는 말이지요. 성에 대한 편견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일상이든 특수한 상황이든 누군가 성 때문에 차별 당하는 일은 사라져야 하겠지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등한 조건에서 동등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뿐일까요? 종교에 대한 편견 역시 사라져야 합니다.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편견, 외모와 신체적 특성에 대한 편견, 나이에 대한 편견, 학력이나 출신 지역에 대한 편견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미 납득하고 수용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여성에게 확장할 것을 제안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자유주의를 덧칠해 먹기 쉽게 만든 페미니즘, 또는 자유주의를 단순히 여성에게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자유주의의 탈을 쓴 페미니즘은 많은 사람의 지지와 동의를 얻습니다. 많은 공감을 사지요. 하지만 여전히 (특히 한국에서) 젠더에 관련한 문제적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체감한다는 방증이지만, 왜 그러한 편견이 발생하는지, 편견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를 묻지 않은 채 단순히 편견의 철폐만을 주장하는 것은 공감 이상의 결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따위의 우스꽝스런 상황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사람이 살면서 갖는 모든 종류의 인식에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경험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험적 요소의 다른 이름이 곧 편견이지요. 경험은 원칙과 필연성을 동반하지 않은, 말 그대로 제한적이고 편향이 있을 수 있는 견해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편견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편견의 대상이나 구체적 내용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왜 인간은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가, 인간은 편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편견이 인간의 굴레라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를 묻는 것이 차라리 진지한 노력일 것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단순히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젠더 담론을 둘러싼 여덟 명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의 진정한 문제의식과 다양한 가능성을 함께 살펴봅시다. 페미니즘 안에는 수많은 이론과 이념 지향이 존재하니까요. (성평등에 관한 주장은 어떻게 보면 사실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가령 어떤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동일성에 초점을 맞춰서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자격을 주장하는 반면, 어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성의 차이에 초점을 맞춰서 ‘차이의 동등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페미니즘은 ‘두 개의 성’이라는 전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 자체가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시각의 수용이라고 비판하면서요. 자연적 성과 사회적 성을 나누는 것은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자연적 성’이라고 한다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정하는지, ‘사회적 성’이라면 그것은 어떤 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 만약 여성의 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남성의 성은 어떤 것인지, 남성적 가치체계가 일방적으로 여성의 성을 만드는 것인지, 혹은 사회적 힘들의 관계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개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인지, 대안적 주체성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일지 논의도 물론 포함합니다. 어떤 페미니즘은 성장과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남아와 여아의 차이에 주목하기도 하고, 또 어떤 페미니즘은 성차를 바탕으로 윤리와 정치, 경제 등에 대한 폭넓은 비판과 검토를 수행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본다면 성에 대한 편견의 극복과 불평등의 철폐는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 자연스런 부산물일지도 모르겠군요.) 이번 세미나는 10월 25일부터 12월 20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일곱시반, 대학로에 소재한 콘텐츠코리아랩에서 진행합니다. 세미나에서 함께 다룰 주제를 소개합니다.

0. Orientation: 성평등을 주장하는 이름은 왜 여성주의인가? (10/25)

1.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절대적 타자에서 실존적 인간으로' (11/1)

2. 뤼스 이리가레 Luce Irigaray, '성차의 존재론과 수평적 초월' (11/8)

3. 샌드라 하딩 Sandra Harding, '포스트모던 입장론의 변화와 한계' (11/15)

4. 캐롤 길리건 Carol Gilligan, '정의 윤리를 넘어 돌봄 윤리로' (11/22)

5. 앨런 식수 Helene Cixous, '여성적 글쓰기' (11/29)

6. 아이리스 매리언 영 Iris Marion Young, '차이의 정치' (12/6)

7.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자연은 얼마나 자연적인가' (12/13)

8. 깁슨-그레이엄 Katherine Gibson & Julie Graham,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경제학' (12/20)

1776년 작성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as equal)’는 것을 무려 ‘자명한 진리(truth to be self-evident)’라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연히 ‘여성도 평등하다’,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이 가능하겠지요. 18세기와 비교하면 여성의 권리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는 철폐해야 할 불평등과, 극복해야 할 편견과, 싸워야 할 차별이 가득하니까요.

하지만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모든 인간(all men)’의 범위를 정하는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배제하는가, 누가 어떻게 ‘동등함(equal)’을 정의하고 시행하는가에 대해 묻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페미니즘은 다수의 이름 아래 무비판적으로 통용되는 모든 통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하지요. 단순히 성평등과 이를 위한 여성의 권익 신장에 초점을 맞추는 페미니즘은 그 필요성과 유효성과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본래의 비판적 기능과 해방의 역량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과 한계를 갖습니다. 때문에 페미니즘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즉 기존의 모든 주류 담론과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어 왔던 편견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고, 이 비판을 통해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로 이번 세미나에서 우리가 함께 탐색할 가능성이지요.

다시 한 번, 즐거운 고민의 밤으로 초대합니다. 목적지는 물론 각자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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