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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I - V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e Amoureax>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사랑이 떠올리는, 사랑에서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의 조각들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것처럼 원문에서 바르트는 일부러 시제와 표현 뒤튼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들은 이야기의 내용이 단순히 바르트 자신의 경험에 대한 회고가 아닌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효과를 갖습니다. 즉 과장된 현재 시제를 반복하는 1인칭의 문장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그 문장의 주인공인 것처럼 인식을 환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와 장소를 떠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겠지요.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e Amoureax>에 등장하는 파편들을 같이 살펴봅시다.

사랑의 구조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동일한 입장에 있는 사람(또는 작중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그에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동일시한다. (동일시, identification)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보다 보는 것에서 더 자주 느껴진다. (이미지, image)

“어떻게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석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 inconnaissable)

약간의 금지와 많은 유희, 욕망을 가르쳐 주고 그 다음에는 내버려두는 것. 마치 길은 가르쳐 주지만 같이 따라 나서겠다고 고집 부리지 않는 저 친절한 원주민들처럼. 이것이 ‘성공적인’ 연인의 구조일 것이다. (귀납, induction)

합리적인 감정: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가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감정: 잘 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은 지속된다. (견딜 수 없는 것, insupportable)

나는 스스로에게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또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를 명령한다. 문제점과 해결책에 대한 이런 종류의 동일성이 바로 함정(piège)의 정의다. (돌파구, issues)

질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고,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질투, jalousie)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문장이 아니다. 그 말은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며, 다만 하나의 한계 상황, 즉 ‘주체가 그 사람에 대해 반사적 관계에 정지되어 있는 상황’에 고착되어 있다. (사랑해, Je t’aime)

“나는 너를 사랑한다”에는 여러 가지 사교적인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등등. 그러나 진짜 거절은 ‘대답 없음’이다. 나는 청원자로서뿐만 아니라 말하는 주체로서도 부인되기 때문에 더 확실히 부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해, Je t’aime)

사랑하는 이에 대한 끊임없는 독백은 그에 의해 수정되거나 부양되지 않는다면 서로간의 그릇된 생각만을 가지게 하여, 서로 다시 만났을 때에는 확인하지 않고 상상만 했던 것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어 서로를 낯설게 만든다. (편지, lettre)

사랑하는 사람은 갑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속박의 사슬로 얽어 맨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자신이 가련한 사람이 아닌 괴물 같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흉측한, monstrueux)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하고, 또 압력을 가하고자 한다: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보세요” (눈물, pleurer)

사랑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가를 집요하게 자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다만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왜, pourquoi)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 하거나 혹은 상대방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을 때, 그는 어떠한 확실한 기호 체계도 수중에 지닐 수 없다. (기호, signes)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정의해야만 하는 끊임없는 요청 앞에서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갖기를 꿈꾼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다정한 몸짓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불안해 한다. (다정함, tendresse)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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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를 포함해 이번 세미나에서 다룬 세 사람의 저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을 단순히 긍정하거나 그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방적으로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사랑에 대한 담론)에 관련한 문제적 상황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프롬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것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을 혼동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을 단순히 사랑할 대상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며, 사랑을 시작하는 것, 즉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완성한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갈수록 사라져간다고 프롬은 진단합니다. 애석하게도 그리 어려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프롬의 진단은 여전히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에 관련한 오해가 깊다는, 사랑이 이렇게 어렵다는 의미일까요?

이성복은 프루스트와 지드의 이야기에 기대어 사랑이 갖는 어떤 특성에 주목합니다. 인간 내면의 활동으로서 사랑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내면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기억과 상상 속에서 사랑은 어떻게 굴절되는지, 사랑에 빠진 사람은 동시에 그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착각과 기만 속에 빠져드는지 그 과정을 쫓으면서요. 프루스트가 지드가 그리는 이야기 속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은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때조차 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모습들은 그만큼 사랑이 합리적인 관점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답답할 만큼 뜻대로 풀리지 않으며 때로 사랑이 사랑에 빠진 사람을 우스꽝스러울 만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을 드러내지요.

사랑은 동서고금 이야기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신화에도, 민담에도, 서사시와 비극에도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지요. 오히려 사랑을 다루지 않는 이야기들이 드물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랑을 남녀간의 관계가 아니라 태도나 인간 관계의 특정 양식이라는 수준으로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매체 속 한국 드라마는 소재나 상황을 막론하고 남녀간의 연애사가 등장한다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사람들은 어김없이 바로 그 연애 드라마에 열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프롬이 제시하는 것처럼 인간의 조건이자 자연스러운 욕구로서 사랑을 행하고 있는, 나아가 세계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로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혹은 이성복이 지적하는 것처럼 환상에 더불어 행복한 사랑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날 사랑에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가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진정한 사랑의 담론, 사랑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극도로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바르트가 진단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누군가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다 목이 아프도록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다면, 물을 구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를 두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면서도, 물 생각만 할 뿐 정작 어디에 물이 있는지 찾지도, 물을 마실 수단을 구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를 두고 무어라 말할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갈망하는 수준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사랑을 원하지만, 정작 그것을 위한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지요.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사랑하고 싶다 생각할 뿐,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 내지는 이성을 꾈 궁리나 하는 것이 고작이지요. 아니면 몇 번의 경험, 또는 지레짐작으로 사랑에 대한 편견 속에 갇히거나 사랑을 단념하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퍽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것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도 어렵게만 느껴지는 일이지요. 오히려 사랑에 대해 생각할수록, 고민할수록 사랑은 답을 알 수 없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미로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유행가 제목 같은 표현이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탐구는 사랑하기 위해, 또는 더 잘 사랑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바르트는 ‘왜(pourquoi)’라는 제목의 장에서 ‘왜 날 사랑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숙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화자는 상대방에게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요. 이 질문은 곧 ‘왜 나를 조금만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물음은 상대방이 내게 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생각, 또는 내가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질문은 다시 ‘어떻게 당신은 나를 조금만 사랑할 수 있나요?’라는 물음으로, ‘조금만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라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잘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선뜻 말할 수 있을까요? 바르트가 제시하는 사랑은 전부로서의 사랑, 그래서 그 속에서 양적인 것이 인지조차 되지 않는 사랑, 그리하여 주고받는 것을 묻고 셈하는 결산 자체를 폐기하는 사랑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소유’라는 관념과 무관한 사랑,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유를 배제하는 사랑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사랑에 목마른 까닭은 정작 이들이 해갈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사랑에 대한 갈망은 본래 해소할 수 없는 갈증, 가시지 않는 목마름인지도 모르지요. 또 어쩌면 당장 눈앞의 연애사를 고민하는 생활인들에게 바르트나 프롬, 이성복과 문인들이 그리는 사랑의 모습이란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대해 실컷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바르트는 사실 사랑의 모든 대화는 독백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 생각하면서 그에게 말을 건네지만 실은 그 말의 은밀한 청자는 자기 자신인 때가 많지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사랑 속에서 결국 거울이 비추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랄까요.

​이런 점에서 이야기는 좋은 거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닮은 모습이 비친다면 그 닮은 꼴을 통해서 나를 확인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엉뚱한 모습이 비친다면 그편은 그편대로 내 모습에 견주며 양쪽을 살필 수 있으니까요. 사랑에 관련한 이야기들 속에 거울이 흥미로운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비단 그것이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이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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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5.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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