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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A - H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은 롤랑 바르트가 1977년 발표한 산문집입니다. 책은 마치 사랑에 관한 일종의 작은 사전과 같습니다. 바르트가 선택한 주제어와 이를 포함하는 제목, 그리고 한두 페이지 가량의 짧은 글들이 차례로 등장하지요.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제목과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짚어볼까요? 먼저 ‘단상’입니다. 우리말 ‘단상(斷想)’은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 또는 파편과 같은 생각의 조각을 의미합니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과연 제목에 걸맞게 그리 길지 않은, 단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짧은 분량의 글들이 모여 있습니다. 다 합치면 꽤 두꺼운 분량이 된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짧은 조각글 모음집으로 보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지요. 그래서 주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통일성을 갖춘 고찰이라기 보다는, 정의할 수 없는 것, 분석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사랑이 갖는 특징을 기술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책의 많은 부분에서 바르트가 사랑의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원제에서 드러나듯이 바르트의 기획에서 이 책은 단편이 아닌 담론(discours), 그것도 하나의 담론(d'un discours)을 의미합니다. 즉 책의 제목은 사랑에 대한 단편적인, 짧고 분절된 생각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구상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제목의 사랑에 해당하는 원제의 표현은 ‘amoureux’인데, 불어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표현 ‘amour’와는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amoureux’가 형용사로 쓰일 때는 ‘~에게 반한’, ‘~을 사랑하는’과 같은 의미도 갖지만 ‘쉽게 사랑에 빠지는’, ‘애정이 담긴’, ‘다정한’과 같은 방식으로 명사를 수식하는 의미 역시 갖습니다. 명사로 쓰일 때는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연인’, ‘애인’,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지요. 그러니까 ‘d'un discours amoureux’라면 ‘연인들의 이야기’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연인들의 이야기라면 연인들에 관련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연인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책의 영어 제목은 <A Lover’s Discourse: Fragments>입니다. 다시 옮기면 <연인들의 이야기: 단편들> 정도가 될까요? 제목과 관련한 이 두 지점을 기억한다면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을 그저 ‘사랑에 관련한 짧은 글 모음’ 이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역자(와 편집자)가 고민했을 ‘사랑의 단상’이라는 표현 역시 매력적인 제목임에는 틀림없지만, 원제에 담긴 미묘한 의미 역시 놓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바르트가 활동했던 20세기 중후반의 파리는 가히 위대한 산문의 시대라고 칭할 만합니다. 문체와 사고 방식 모든 면에서 개성 강한 스타일리즘이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한 시대라고 할까요. 이론적 글쓰기와 비평적 글쓰기, 문학과 철학, 운문과 산문을 오가는 독특한 사유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고 방식은 그에 걸맞은 다양한 스타일의 등장으로 이어지지요. 사원소에 기대고 있는 바슐라르의 시학이나 푸코가 고고학이라고 명명한 탐구의 방법들, 기존의 철학을 해석하는 들뢰즈의 접근, (개념의 사용이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수학기호들을 적극 활용해 인간의 무의식을 해석하는 라캉의 방법 등이 그렇습니다. 철학적 성찰을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하는 사르트르나 카뮈 등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철학의 인식론적 성격에 주목하며 의학과 병리학을 중심으로 과학사를 재검토하는 캉길렘, 매끄럽게 조탁한 언어를 매개로 성, 죽음, 불가능, 침묵과 같이 철학이 이전까지 등한시했던 다채로운 주제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바타유나 블랑쇼와 같은 이들도 떠올릴 수 있겠고요. 말과 글,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주목하여 이를 바탕으로 유럽의 지적 전통 전체를 문제 삼는 데리다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물론 이러한 특징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입니다. 사유의 풍성함이나 스타일이 주는 즐거움을 긍정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사유의 대상을 엄밀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을 학문의 근본정신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이전보다 퇴보한 사유가 아니냐는 의심 역시 존재하지요. 한마디로 스타일이라는 미명 아래 ‘도대체가 읽기 어려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글들이 쏟아져 나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사유를 뭉뚱그려 통칭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이면에는, 모더니즘 이후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이들 사유가 대체로 모더니즘을 비판, 지양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딱히 공통의 지적 작업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스타일과 난해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종종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웹사이트 ‘http://www.elsewhere.org/’는 ‘포스트모더니즘 생성기(postmodernism generator)’를 제공하는데, 여기에 접속하면 누구나 클릭 한 번으로 ‘그럴 듯한’ 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장된 단어를 무작위로 조합해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듯한’ 글을 생성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페이지에 접속해 시험해보면 ‘사회적 현실주의와 실재의 자본주의적 패러다임(Social realism and the capitalist paradigm of reality)’, ‘정체의 담론: 변증법적 서사와 의미론적 후기해체주의 이론(The Discourse of stasis: dialectic narrative and semanticist postdeconstructive theory)’, ‘계급 무용론: 보로스 작품의 표현주의(The Futility of class: expressionism in the works of Burroughs)’, ‘사회의 변증법: 여성주의와 합의의 구상적 패러다임(The Dialectic of society: feminism and the conceptualist paradigm of consensus)’과 같은 제목의 글들이 클릭 한 번에 만들어집니다. 재밌지요.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파리의 산문들이 갖는 장점은 단순한 문장의 매력을 초과합니다. 글쓰기의 형식은 사유의 형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지만, 단순한 보관 용기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사상을 담는 그릇으로 극적 장면을 설정하고 등장인물을 내세운 대화라는 형식을 선택했고,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식으로 정의와 공리, 증명으로 이루어진 윤리학을 완성했습니다. 플라톤이 그리는 대화, 즉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문답을 교환하는 형식은 대상에 대한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고 사유에서 모순을 제거하려는 플라톤의 사유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스피노자의 방법은 하나의 진리에서 다른 진리를 연역하는,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루는 능산적(能産的, naturant)세계관을 담고 있지요.

​이처럼 글의 형식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사유를 직접적으로 반영합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의) 글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 사유인가’라는 물음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에 따라 대상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나아가 어떤 대상을 볼 수 있고 어떤 대상을 볼 수 없는지 또한 결정되지요. 따라서 글의 형식은 그 글에 담긴 어떤 사유의 독특한 무늬를, 사유의 결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르트는 짧은 에세이라는 형식을 통해 거대 담론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사랑의 미묘한 지점들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지요. 앞서 살펴보았던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프롬은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따라 범례를 제시한 뒤 사랑의 유형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진정한 사랑과 거짓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성복은 사랑이 갖는 환상으로서의 성격에 주목하고 프루스트와 지드 속 장면들에서 사랑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특징들을 갖는지 다루었지요.

​바르트는 오늘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사랑에 대한 담론은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지적을 책의 맨 앞 장, 문자 그대로 본문을 시작하기 전 가장 앞 쪽에서 언급합니다. 이에 따르면 사랑에 대한 기존의 수많은 언급은 사랑의 구체성이 아닌 그것의 행위만을 추상한 형태로 다루기 때문에, 일종의 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초상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주제라고 언급하지요. 바르트는 자신이 제시하는 담론의 파편들을 형상(figure)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역자는 ‘문형(文形)’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하지요. 본래 ‘文型’ 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지만, 바르트는 ‘figure’에는 단순한 도식이나 형태가 아닌 움직이는 형상, 동작을 포함하는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항상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연인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이라는 글이 갖는 형식적인 특징에는 바르트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책에는 때로 완결되지 않은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어순이 뒤죽박죽인 이상한 표현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얼핏 봐서는 가지런히 정리되지 않은 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은 듯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물론 독자에게는 이러한 혼란에 수긍할 수 있는 여지가, 어지러움 속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 때 떠올리는 것들은 논리적이고 완벽하게 통제된 정밀한 체계가 아닌 바로 우연에 뒤섞이고, 때로는 매끄럽게 흘러가다 맥없이 끊어지기도,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상황들이니까요. 바르트는 책의 모든 내용을 규정하는 한 마디로 본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에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주제어, 주제어에 관련한 잠언과 같은 짧은 경구,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괴테나 플라톤에 등장하는 장면들, 정신분석학의 주장이나 사례들, 바르트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들, 동서양을 망라하는 여러 우화들이 폭넓게 등장하지요. 책에서 바르트는 총 80개의 낱말을 선택해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오늘 밤 우리는 ‘s'abîmer(빠지다)’부터 ‘habit(의복)’까지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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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전반에서 1인칭 화자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목소리를 단순히 바르트의 목소리라고 곧바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개인적 경험을 털어놓는 자전적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한글 번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눈에 선뜻 띄지 않는 부분이지만) 원문은 현재 시제를 이례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했다’, ‘~였다’와 같이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다’, ‘~하다’와 같은 어미를 고집하여 상황이나 상태를 제시하고자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재 시제의 강조는 바르트가 제시하는 경험을 탈개인화하여 사랑하는 사람(amoureux)의 체험 일반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인칭 화자는 바르트 개인이 아닌 사랑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주체와 같다고 볼 수 있지요.

바르트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들, 생각의 미세한 움직임들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분산된 언어의 파편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연속은 그/녀의 생각이 정교하지 못하거나 그/녀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련한 담론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보고 있지요. 그래서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의 단편식 구성이나 복잡한 문체 등은 이러한 특징을 온전히 포착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사랑에는 분명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에서 바르트가 취하는 접근은 수수께끼를 모조리 풀어내기 보다는 수수께끼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편에 가깝습니다. 흔히 그것이 문제인지도,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랑 속 많은 상황을 천천히 짚으면서 수수께끼를 드러낸다고 할까요. 책의 곳곳에서 그는 잠언과 같은 여러 격언이나 불교 공안(公案, koan), 중국의 고사 등을 인용하며 생각할 거리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바르트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대화가 근본적으로 독백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수수께끼는 독백으로서의 사랑에 퍽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바르트가 소개하는 불교 공안의 한 장면을 옮깁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불교의 한 공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승이 제자의 머리를 오랫동안 물속에 넣고 붙잡고 있다. 차츰 거품이 희박해지고,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스승은 제자를 꺼내어 되살린다: 네가 지금 공기를 갈망했던 것처럼 진실을 원할 때, 너는 비로소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그 사람의 부재는 내 머리를 물속에 붙들고 있다. 점차 나는 숨이 막혀 가고, 공기는 희박해진다. 이 숨막힘에 의해 나는 내 '진실'을 재구성하고, 사랑 속 완고함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m: 부재하는 이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 나를 붙잡은 손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상상 속에서 혼자 질식해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2016. 9. 28.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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