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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아니 그럼, 여자 때문에 부인을 떠난 게 아니란 말입니까?”

“당연히 아니오.”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내가 왜 그렇게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참 순진했던 모양이다.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나는 한참 동안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자가 돌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려야 해요.”

그가 되뇌었다.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이런 맹추 같으니라고!”

“제가 왜 맹추입니까? 분명한 사실을 말하는 게 맹추란 말인가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의 증권거래소에서 근무하는 중년 남성입니다. ‘중년 남성’이라는 익명의 일반명사에 어울리는, 아주 전형적인 금융업 종사자의 모습이지요. 증권거래소에서 근무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다정하고 착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따분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입니다. 마흔쯤 먹은 나이에 특출나게 잘생기지도 못나지도 않은 외모의 평범한 인상의 소유자이지요. 문학이나 예술에는 별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 그를 구분할 만한 괴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별 특징이랄 것이 없는 것이 특징인,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생활인 정도가 되겠군요.

스트릭랜드에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문화와 예술에 아주 관심이 많은 ‘교양인’이지요. 사교 모임에서도 주위로부터 빼어난 조예와 안목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듣습니다. 틈 나는 대로 문인이나 화가 같은 작가들은 집으로 초대해 오찬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그녀의 훌륭한 취향에 대한 칭찬 역시 빠지지 않고요.

그리고 한 작가가 어떤 사교 모임에서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만납니다. (그는 몇 해 전 발표한 책으로 문단의 호평을 받고 런던 사교계에 발을 들인 사람입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그의 책을 칭찬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던 다른 소설가가 부인에게 그를 소개해준 것이지요. 이들은 몇 차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스트릭랜드 부인은 그를 만찬에 초대하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트릭랜드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세간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썩 무던한 첫 만남이었지요. 훗날 그는 이 첫 만남을 명랑하고 손님 접대를 잘하는 아내와 약간 따분하지만 삶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남편, 이들 부부 사이의 잘생기고 건강한 두 아이까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평균적인 모습으로 회상합니다.

런던 사교계의 이야기는 휴가의 계절을 지나면서 이야기는 급전하기 시작합니다. 휴가를 마치고 이른 가을 런던으로 돌아온 그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것이지요. 스트릭랜드가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났다는 소식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소식을 들은 날은 스트릭랜드 부인을 찾아가기로 사전에 통지한 날이었습니다. 그간 부인에게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으므로 그는 그녀를 찾아가야 할지, 말하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모른 척 그녀를 찾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찾아간 집에서 실의에 차 울고 있는 그녀와 흥분한 그녀의 형부를 만납니다. 난처해진 그는 몇 마디 인사를 건넨 뒤 황망히 그곳을 빠져나왔지요.

며칠 뒤 그녀가 다시 그를 초대합니다. 지난 만남의 결례를 사과하며, 두서없이 스트릭랜드에 관련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요. 그러다 남편이 남긴 편지를 꺼내어 보여줍니다. 짤막한 내용의, 떠남에 대한 설명이나 미안함도 없이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나겠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집은 잘 정리되어 있을 거다,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 정도의 문구였지요. 아내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으리라 짐작합니다. 세간의 소문도 그렇지요. 얼마 전까지 멀쩡하게 잘 살던 중년 남성 직장인이 갑자기 사라졌다는데 사람들의 상상력이 뻔하지요. 추가 항상 좌우로 흔들리듯 사람들의 생각 역시 늘 같은 자리를 돌기 마련입니다.

대화를 나누다 잠시 머뭇거리던 스트릭랜드 부인이 그에게 조심스레 부탁을 꺼냅니다. 바로 파리로 가서 남편을 만나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그는 당연히 깜짝 놀랐습니다. 스트릭랜드 씨라면 예전에 초대받은 식사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래서 정중히 거절하려 했지만 부인은 내심 결심이 단단한 모양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적임자다, 그라면 남편도 대놓고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 속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기도 부끄럽지 않겠느냐, 그저 온 가족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한마디만 전해주면 된다며 간청하지요.

결국 그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파리로 향하는 내내 걱정이 이만저만하지 않지요. 곰곰이 되짚어 보니 내심 이용당한 것 같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터뜨리는 울음이며, 준비된 손수건이며. 정말 남편을 아직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구설을 피하고자 어떤 식으로든 황급히 일을 매듭지으려는 건지. 그러면서도 어쩐지 설레여 하기도 합니다. 이번 파리 여행은 어딘가 두근거리는 모험 같은 구석이 있다고 느끼면서요. 그리고 드디어 파리에 도착합니다. 스트릭랜드가 묵고 있다고 알려진 호텔을 찾아 마침내 그를 만나지요. 타인의 시선에 그저 따분한 주식 중개인 정도로 비쳤던 스트릭랜드, 그가 마침내 자신의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

… (중략) ...​

잘 알려진 것처럼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는 고갱의 삶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몸은 이 소설을 구상하며 타히티를 여행하기도 했지요. 타히티는 소설에서 스트릭랜드가 숨을 거둔 곳이자 고갱이 생의 마지막까지 작업하며 거주했던 곳입니다. 소설의 화자가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의 기억과 흔적을 찾던 것처럼 몸 역시 그곳에서 고갱의 흔적을 쫓으며 그의 삶을 그렸을 겁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스트릭랜드의 이야기와 실제 고갱의 삶이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야기는 고갱의 삶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의 이야기처럼 고갱 역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 증권거래소에서 근무했었고,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한 뒤 가족을 떠나 혼자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지요. 타히티에서 만년을 보낸 사실이나 생전에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점도 유사한 점입니다.

몸이 스트릭랜드를 관찰하는 화자의 시선을 빌려 표현하는 예술과 삶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탐미적입니다. 자기 자신마저 삼킬만큼, 파괴적일 정도로 탐미적인 시선이지요. 이러한 관점은 스트릭랜드가 자신을 사로잡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납니다. 소설은 스트릭랜드를 마치 살아있는 예술의 화신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본 것을 그려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따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는 인물이지요.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 역시 죄다 그가 전진하며 일으키는 풍압에 휩쓸려 들고 맙니다. 화목한 가정, 풍족한 생활, 사회적 지위와 안정, 세간의 평가, 인륜과 도덕도 그를 가로막지 못합니다. 신체의 안위조차 문제가 되지 않지요, 죽을 뻔한 병치레나 풍찬노숙도 다반사입니다. 남들 눈에 악행과 기행으로 보이는 일들도 서슴지 않아요.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 진실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정체성인것처럼 보입니다. 문명의 미명에서 나병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도, 죽기 전 시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그는 오로지 그릴 뿐입니다.

글쎄요, 물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안정적인 금융업 종사자가, 그것도 세계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 런던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어느 날 훌쩍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모습은 잘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상상은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 뭐 꿈을 찾아서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주변에서 하나둘쯤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삶도 가족도 다 버리고 돈 한 푼 들지 않고 완전히 다른 도시로 떠난다면? 게다가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을 작정으로요.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태연히 감행합니다. 자신의 예술, 그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처음 스트릭랜드가 사라졌을 때 주변 사람들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으리라 추측합니다. (자신들의 시각에서) 얌전히 멀쩡하고 선량하게 잘 지내던 몰취미한 직장인이 편지 하나 달랑 남기고 파리로 떠났다면 뻔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스트릭랜드의 부인은 별 친분이 없는 화자를 사신으로 선택합니다. 그라면 스트릭랜드가 의심하거나 박대하지 않고 적어도 만나는 주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답답하기야 했겠지요, 바람이 났든 노망이 났든 뭐라도 말이라도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납득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멀쩡하던 남편이 어느 날 ‘나는 간다, 찾지 마시라’는 한 줄만 휙 남기고 사라졌다면 그야말로 복장 터질 노릇 아니겠습니까.

스트릭랜드를 찾아간 화자는 처음엔 주뼛대며 말을 꺼냅니다. 부인과 귀여운 자식들을 생각해봐라,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 정작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 작정이냐 운운. 스트릭랜드가 태연히 대답하지요. 생각도 안 난다, 내 알 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상관없다, 부인이야 재혼 하라지, 내 살 길은 내가 알아서 찾으면 된다 등등.

이 남자의 뻔뻔함에 화자도 점차 언성을 높입니다. 가족이나 도덕을 들먹이는 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자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를 회유하려 들지요.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오로지 한마디만 되풀이합니다: “나는 그려야 한다(I’ve got to paint).”

정체성과 관련한 이야기 가운데는 유독 누군가, 어디론가 떠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마 정체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에 자리한 동일성이라는 속성은 실은 이질성과 맞물려 있는 속성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같은 것들’의 자리를 벗어나 ‘다른 것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 다른 것들 사이에서 어떤 동일성을 갖고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하까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결국 안을 향한 물음과 (나는 누구인가?) 밖을 향한 물음 (이것은 무엇인가?) 사이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지요.

이야기에서 스트릭랜드가 부인 앞으로 한 통의 편지만을 남긴 채 떠난 때가 그의 나이 마흔입니다. 타히티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은 것이 마흔일곱이고요. 도전에 늦은 나이는 없다지만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꿈을 찾아 떠나기에 썩 이르다고 보기는 어려운 나이인 것 같습니다, 부인의 부탁을 받고 스트릭랜드를 찾아온 화자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다고 떠나느냐고 묻자 그래서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노라 직접 답하기도 하지요.

여행도 모험도 아닌 순전한 떠남,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람 역시 이런 종류의 떠남을 감행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그의 나이 일흔다섯에 야훼의 부름을 받고 살던 고향을 떠납니다. 스트릭랜드보다 훨씬 늦은 나이지요. 이들 사이에는 나이보다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아브람에게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바로 야훼의 약속이지요. 야훼는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아브람은 그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지요. 물론 이후 아브람이 겪은 고생도 스트릭랜드의 고생담 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아브람이 야훼의 약속에 기대어 험준한 시간들을 견딜 때 스트릭랜드는 그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안간힘 속에서 매순간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려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오직 그리는 동안, 자신의 그림 속에서만 그 자신일 수 있었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모험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사회가 있다면 오히려 별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 싶군요. 일상에서 안온하게 자신의 원하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사회, 위협 없이 정체성을 고민할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나? 이렇게 사는 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도 찾을 수도 없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을 벗어던져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위태롭(지만 재밌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삶을 송두리째 내걸 수 있을 만한,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계신가요? 다른 한편 누군가의 정체성은 꼭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고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스트릭랜드처럼 살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순간,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너무나 진실한 나머지 다른 것들이 가짜로 느껴지는 순간은 모두의 삶에서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꽤 많을 수도 있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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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7. / 아름다운가게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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