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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을 살피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사색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확신하는 것 너머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만남을 단념했다는 것, 이 영원한 거울들 속에서 정작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자신만을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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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볼품없는 초라한 외모의 늙은 과부입니다. 그녀는 친구도 없고 뚱뚱한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평생 가난했고 나이는 어느새 오십을 훌쩍 넘겼지요. 그녀의 직업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소규모 고급 아파트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일곱 이른 나이에 자신의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그 아파트에서 일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7년째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고요.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그녀가 일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나 유명한 사업가, 은퇴한 자산가 같은 ‘어마어마한’ 부자들이나 명망가들입니다. 그녀는 그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양과 체면 때문에라도 드러내놓고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진 않지만,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대체로 그들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없는 사람’처럼 여기지요. 그들이 그녀를 찾아오거나 말을 거는, 그러니까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도 실은 그녀에게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대개 그런 상황은 그들이 그녀에게 뭔가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니까요. 사람들은 그녀에게 무례하게 우편물을 받아 달라고 요청하거나, 때로 세탁물을 대신 찾아와 달라는 식의 심부름 등을 ‘부탁’ 하기도 합니다. 아파트만이 아니라 그녀가 어딜 가든 대체로 사람들은 그녀를 홀대하곤 합니다. 물론 그녀 역시 이런 상황들에 익숙하고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여자가 있습니다. 열두 살 소녀이지요. 소녀의 집은 큰 부자입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장관까지 역임한 현직 국회의원이고, 소녀의 어머니는 박사 학위까지 마친 소위 ‘배운 사람’이고, 소녀의 언니는 파리1대학 석사 과정에서 종교학과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이랄까요?

소녀는 영리하고 똑똑합니다. 또래 아이들과 비교한다면 이미 하늘과 땅 차이지요. 물론 그녀 자신의 생각입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 자신이 ‘일부러 사람들에게 주목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능력을 조금 죽이고 있지만’ 언제나 학급에서 성적 1등은 소녀의 차지입니다. 열두 살에 이미 고등사범학교(ENS) 진학을 준비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소녀는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냉정하게 판단합니다. 소녀의 부모는 부자고 아빠는 조만간 국회의장이 될 것 같습니다. 사업이 망한다든지 갑작스레 재산을 탕진할 일도 좀체 생길 리가 없겠고. 소녀는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과 부유함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자신 역시 부자고 미래의 자신 역시 잠정적 부자일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소녀의 현실은 대체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실은 만족스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만으로 꽉 차 있지요. 소녀가 바라보기에 현실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합니다. 소녀가 다니는 학교의 문학 선생님은 문법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말을 잘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며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소녀가 보기에 이런 생각은 정말 우스꽝스럽습니다. 문법 따위를 배우지 않아도, 문법 따위를 공부하기 훨씬 전부터 모든 사람들은 ‘이미 모두 말을 잘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말의 법칙을 배워야만 말을 잘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은 벙어리로 가득하겠지요, 소녀는 이미 일상에서 충분히 말 잘하면서 살고 있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말을 잘하기 위해 문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소녀에게 이런 생각은 대소변을 잘 치르기 위해 화장실의 역사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궤변에 불과합니다. 소녀는 자신이 이런 사람한테 무언가를 배우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심장 발작’을 떠올릴 만큼 경악합니다.

소녀 주변의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소녀의 가족은 그녀의 일상을 끊임없이 파괴하는 침략자들이지요. 소녀의 언니는 자칭 ‘유쾌한 쾌락주의자’입니다. ‘어차피 인생에는 거대한 의미도, 심각한 것들도 없다, 그러니 나는 온전히 매 순간을 향유하고 즐기며 지내겠다’를 신조로 살아가면서요. 하지만 소녀의 눈에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소녀의 언니가 하는 일이라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하는 일마다 일일이 해설을 달면서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머리 맡 전등의 위치가 3cm만 바뀌어도, 혹은 코트에 고양이 털 한 올이라도 붙어 있기라도 하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것 뿐이니까요. 소녀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유쾌한 쾌락주의자는 고사하고 신경쇠약의 소인배일 뿐입니다.

소녀의 엄마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10년째 정신분석 상담을 받고 있는데, 그걸 또 기념한다고 굳이 10주년까지 챙기며 그간의 자기 삶이며, 담당 의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며, 하는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면서도 10년간 매일매일 꼬박꼬박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실만큼은 ‘마치 그런 일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처럼’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소녀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얼마나 정신 나간 사람인지 또렷하게 드러나는 장면인데요. 그런데도 소녀의 엄마는 늘 우리 둘째가 이상하다, 뭔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하소연입니다. 소녀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소녀는 결심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중대한 결심을요. 한편 소녀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사이, 아파트 경비원에게도 커다란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요. 이렇게 파리의 고급 아파트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12년 인생의 소녀와 54년 인생의 경비원, 두 사람의 삶이 서서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 (중략) ...

소설이라는 매체가 세상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지도 수백 년이 지났지만, 소설의 성격과 정의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직까지 어떤 연구자나 사전도 모든 사람이 수긍할 만한 완벽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지요. 일찍이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Don Quixote>를 집필하며 소설을 ‘책 중의 책(Livre des Livres)’이자 ‘예언자적 성서(la Bible Prophetique)’라고 가리킨 바 있지만 이건 사실 정의라고 할 수도 없는 예언적 칭송에 불과합니다. 예술으로서의 소설의 의미에 주목하는 버지나아 울프의 정의나 (‘소설은 실제 인물의 삶과 완전하고 진실한 관계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유일한 예술 형식이다.’) 쿤데라의 정의 (‘소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실존의 단면을 포착하는 예술 형식이다.’) 역시 어딘가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 OED>은 소설을 ‘일정한 수준의 사실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통해 꾸며낸 산문 형식의 이야기’로 정의합니다. 프랑스의 <문학 사전 Dictionnaire le Littré>은 소설을 ‘작가가 열정과 풍속의 묘사에 의해서, 혹은 모험들의 특징에 의해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는 산문으로 쓰인 꾸며낸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고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뜻을 명백하게 밝히고 규정하는 것을 개념 정의의 의미이자 목적이라고 했을 때 소설을 ‘진짜이거나 가짜인 하나의 이야기’라고 정의하는19세기의 <라루스 사전Dictionnaires Français Larousse>은 거의 쓸모없는 정의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간행한 <표준국어대사전>은 소설을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으로 정의하고, 소설이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전들의 정의는 대체로 유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소설을 정의하기 위해 ‘사실’과 ‘꾸며낸 것’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제시한다는 점에서요. 프랑스의 독문학자 마르트 로베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에 대한 정의가 언제나 불충분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사실’과 ‘꾸며낸 것’ 사이의 경계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언제나 그 경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요. 따라서 소설은 ‘사실에 바탕을 둔 꾸며낸 이야기’와 ‘꾸며낸 것 같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이야기’ 사이의 긴장을 벗어날 수 없는 셈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로베르가 지적하는 바로 이 긴장이 소설이라는, 이야기라는 형식의 근본 충동을 형성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 얽혀 있기 마련이니까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가진 르네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의식이 태어난 순간이지요. 사람들은 대개 의식의 자각과 신체의 출생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르네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들이 출생 말고는 다른 생명의 상태를 상상할 줄 모르기 때문이지요.

신체적 생명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식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이 필요합니다. 다른 대상과 자신을 구분해서 지각할 수 있는 이름이요. 그리고 르네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모두가 고함을 지르고 어른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 자기 일만 하는 곳, 굶지 않고 허기를 채울 만큼의 음식과 추위를 피하고 몸을 감쌀 수 있을 정도의 옷이 주어지는 곳, 몸짓과 고함만이 가득한 가난한 자신의 집이 아닌, 다섯 살 처음으로 학교에 갔을 때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넸던 그 순간을요. 이제 허기진 영혼은 이야기에 탐닉합니다. 단 한 번 배가 부른 적도, 그렇다고 굶주렸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식욕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아이가 처음으로 허기를 자각한 순간, 고통인 동시에 계시의 그 순간부터 삶은 달라지기 시작하니까요.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시선 아래에 있을 때 편안해 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기대한 모습 그대로, 요구하는 역할 그대로, 남들이 생각하는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때요.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 바깥의 타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눈뜨고도 외면하거나, 자신의 시선으로 그들을 가두려 들지요. 톨스토이와 후설을 읽고 모차르트를 들으며 17세기 네덜란드 화풍 취향의 아파트 경비원을 상상하지 못하고, 열두 살 소녀가 야콥슨을 인용하면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요.

르네는 가난하고 못생긴 농부의 딸, 늙고 뚱뚱한 과부,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아파트 경비원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또 사람들이 그런 모습들에서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그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지요. 수위실에 앉아 커튼을 내리고 내면으로, 또 이야기가 만드는 매력적인 세계를 넘나들면서요.

최초로 자신을 발견했던 순간 이후 다섯 살 소녀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책 속의 이야기를 먹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세상 어디에서도, 어떤 관계에서도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드러낼 수 없으리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결국 이야기로 인해 그녀는 다시 세상으로, 어떤 관계들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야기는 어떤 의미인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르네가 제안한 좋은 책과 좋지 않은 책을 구분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자두 테스트'라는 방법입니다. 르네에 따르면 자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입니다. 자두 테스트는 책을 읽을 때 자두를 함께 먹는 것이지요. 르네에 따르면 그토록 맛있는 자두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책의 내용이 흥미롭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이고, 읽고 있는 책의 내용보다 자두 맛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면 그 책은 별로 좋은 책이 아닙니다. 자두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지요. 혹시 다른 기준, 르네처럼 책을 판단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셔도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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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6. / 아름다운가게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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