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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마리아스, <새하얀 마음>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비밀을 이야기해주면 그가 자신을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이야기할 때마다 선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단다. 그게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고, 가장 커다란 정절이고,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가장 커다란 증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득이 되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이야기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게 된단다. 하던 이야기는 조만간 소진되거나 반복되는 거야. 그건 듣는 사람에게도 충분치 않지. 말하는 사람은 지칠 줄 모르고, 듣는 사람도 지칠 줄 모르니까. 말하는 사람은 한없이 상대방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단다. 자신의 혀로 끝까지 파고들어가고 싶어 하지. 그리고 듣는 사람은 이야기 속에 한없이 빠져 있고 싶어 한단다. 자꾸만 더 듣고 싶고 알고 싶어 하지. 비록 꾸며내거나 거짓 이야기일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솔직한 사람, 혹은 수다스런 사람 역시 마찬가지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뭐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내밀한 기억들, 경험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누군가와 모두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물리적인 제약도 있을 테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비밀스런 사람,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모든 일,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다 비밀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삶을 돌이켜 보면 기억으로 응고하는 경험보다 휘발하여 사라지는 경험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미처 그 경험을 표현할 말이나 표현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요. 프랑스의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비밀을 갖는 것은 곧 영혼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리지요. 비밀을 갖는 것이야말로 누군가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하는 가장 내밀한 확실성이고, 그래서 키냐르에게 있어 누군가의 비밀은 그 사람의 영혼에 비견할 만한 것입니다. 영혼이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비밀은 한 사람을 온전히 그 사람일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밀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드문 일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전부 비밀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비밀을 갖는다는 것, 비밀을 구하다는 것은 영혼을 찾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셈이니까요.

아마 오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새하얀 마음>은 이번 세미나에서 이제까지 다룬 이야기들에 비해 읽기 힘든, 혹은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이야기의 서사적 얼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하면 전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눈에 쏙쏙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랄까요, 줄거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의 흐름과 그것을 구성하는 사건이 선뜻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로서는 전체 이야기에서 자신이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고, 왠지 모를 답답함을 꾸준히 참으면서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일은 실은 퍽 지루할 수 있는 일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그 이야기가 무려 소설, 서사 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이해하고 서사적 재미를 쫓아가는 독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일 때라면 더욱 그렇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도식적이거나 전문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더라도 의미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직관적으로 습득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수준의 암기법을 활용하거나 논리에 맞춰서 정보를 재단하고 정보의 선후관계나 인과관계 등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정보를 배치하는 방식 등을요. 그 가운데 ‘이야기’는 인간이 정보를 처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접할 때 대개 서사적 얼개를 따라 의미의 배열을 쫓아갑니다. 반대 방향에서 보면 인간이 대개 서사적 얼개를 따라 의미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 때 역시 대개 서사적 얼개를 따라 구성한다고 볼 수도 있지요. 기본적으로 서사를 따라 의미와 정보를 처리하는 것은 전문적으로 대단하게 문학을 공부하고 여러 이론들을 두루 배웠다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사실 정보 처리에 있어 서사가 갖는 장점은 대단히 유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서 대단히 많은 정보들이 ‘이야기’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요. 의미의 보존과 기억의 전승에 있어 서사는 대단히 큰 효용을 갖습니다. 게다가 정보의 전달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보 처리의 효율성은 물론 정보의 수용자 입장에서도 서사적 긴장이 주는 흥미를 통해 이야기에 담긴 정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지요. 이야기에 있어 서사성은 이야기가 구두로 전해질 때, 즉 음성 언어에 담겨 있을 때나 이야기가 문자 언어에 담겨 있을 때나 최근처럼 영상 매체에 담겨 있을 때도 여전히 이야기 속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야기와 서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까요.

이런 가운데 현대 일부 소설들은 전통적인 서사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설이라는 매체는 이야기가 갖는 전통적인 서사라는 구성 방식에 늘 도전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움직임의 정도와 방향은 다양합니다. 특정 목표나 이야기의 주제에 따라 사건의 서사적 배치를 가볍게 뒤바꾸는 수준에부터 이야기를 이루는 사건들의 서사적 관계를 끊으려는 시도들까지요.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새하얀 마음>을 전통적 서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키기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비록 서사적 얼개가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대체로 서사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느슨하고 흐릿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야기는 서사에 기대어 나아갑니다. 서사를 쫓아가다 보면 이야기의 말미에 ‘어떤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고, 바로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서사의 긴 우회로를 돌아야 했던 것이지요.

대개의 이야기는 흔히 ‘반전’이라고 부르는 숨은 핵심을 드러내기 위해 사건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서사적 긴장을 유지합니다. 반면, <새하얀 마음 Corazón Tan Blanco>은 대체로 담담하고 가끔은 외려 독자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분산시키는 방식을 통해 숨은 핵심으로 독자를 유도하지요. 마치 숨겨놓은 비밀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마저,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실까지도 감춰놓고 새삼스레 눙치는 것 같달까요,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어떤 중요한 비밀이 있는 듯한 가능성만 슬쩍 내비쳐 놓고서는 이내 독자가 그 비밀을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도록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뭔지 모를 이야기들을, 굳이 왜 꺼내는지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문득 비밀의 문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두서없이 선회하던 이야기들의 자리가 나타나지요, 바로 그 비밀을 통해!

한편 묘사에서 느낄 수 있는 흥미 또한 이야기가 선사하는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황, 장면, 인물, 사건 등의 생생한 묘사는 이야기에 매력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B사감이 학생들로부터 압수한 연서를 늦은 밤 사감실에서 남몰래 낭독하는 모습을 그리는 현진건의 묘사, 책장과 창밖 사이에서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흩어지는 안나의 시선을 포착하는 톨스토이의 묘사, 비틀비틀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 키호테와 뒤뚱거리는 로시난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르반테스의 묘사까지, 이야기에서 묘사는 독자에게 마치 당장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흥미를 제공하지요.

독자가 서사를 따라서 이야기의 전체 얼개를 그려나간다면 묘사 앞에서 독자는 자신이 쫓는 이야기의 매순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상상이라고 볼 수 있는 이 활동은 사실 굉장히 능동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상 매체가 직접적이고 가장 구체화된 형식으로 제시하는 장면을 마주하는 것과 언어라는 추상적 기호가 묘사하는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영상 매체는 독자에게 우선 영상이 담고 있는 정보의 정확한 수용을 요구한다면, (물론 이미지의 의미작용을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언어적 묘사 앞에서 독자는 제시된 정보를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 추상적 기호에 불과한 언어적 묘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체화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그래서 같은 장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것을 넘어, 장면 자체를 그리는 방식 자체가 다양할 수 있는 것이지요.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면 자신의 의도한 모습 정확히 그 지점에 독자가 도달할 수 있도록 탁월한 묘사를 제시하겠지만, 실은 꼭 그것만이 묘사의 유일한 목표는 아닙니다. 때로 상상이 구체를 압도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를 테면 김승옥이 <무진기행>에서 무진의 안개를 묘사할 때를 떠올려 볼까요? 김승옥의 묘사 앞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안개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 어떤 형상을 이룹니다. 읽는 사람이 묘사하는 언어를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떠올리는 것은 물론 묘사의 여백 역시 제각각 상상하며 채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의 의미에서 있어서 안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다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개의 형상과 느낌 그 자체에 대한 상상 역시 다양할 수 있습니다.

<새하얀 마음>의 첫 장면도 그렇습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방아쇠를 당긴 여자를 중심으로 사건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지요. 장면은 반쯤 나체로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 여자의 몸이나 죽은 여자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변기 위에 던져진 속옷, 세면대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물 등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지만 결국 그 장면의 구체적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읽는 사람이 완성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상세한 묘사라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것도, 묘사의 여백을 능동적으로 채우는 것도 독자의 몫이니까요. 몫이자 재미이기도 합니다.

충격적인 첫 장면이 지나간 뒤 곧바로 이야기의 화자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 사건은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더구나 자신이 ‘태어날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면서요. 죽은 여인은 그의 이모이자 그의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란스는 테레사라는 여인과 결혼했지만 테레사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며칠 뒤 자살합니다. (물론 이 둘은 굉장히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녀는 집에서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도중 혼자 욕실로 들어갔고, 거울 앞에서 권총으로 심장을 겨눈 뒤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후 란스는 테레사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이야기의 화자는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테레사의 자살은 가족들 사이에서 비극으로 기억 되기에 충분한 사건입니다. 죽음뿐 아니라 죽음의 이유에 있어서도요. 밝혀진 정황 상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젊은 신부가 자살을, 그것도 굳이 손님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자살을 감행할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지요. 그렇다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신부를 잃은 란스에게 마냥 이유를 추궁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한 뒤로는 더욱 그랬겠지요. 어느날 찾아온 비극은 대부분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잊혀지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합니다.

우연히 삶을 이루는 사건들이 어떤 대칭을 이룰 때, 그 구도와 배치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불현듯 다시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란스의 아들 후안이 장성하여 결혼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들 부부가 신혼여행의 막바지에 후안의 외할머니의 출생지를 지날 때 문득 후안은 어떤 불편함을 자각하지요. 그가 호텔 발코니에서 우연히 겪은 사건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외할머니의 출생지를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는 곧 어머니의 언니이자 자신의 이모, 아버지의 전 아내였으나 모종의 비극적 사건으로 지금 후안의 가족관계를 만든 테레사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지요. 당연히 그의 오늘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그날의 사건 역시 함께 떠오릅니다. 물론 후안이 직접 겪은 사건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그는 그날 밤의 일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비밀을 향해 굴러가는 이야기의 톱니바퀴와 함께요.

… (중략) ...

이야기에서 화자 직업은 통역사입니다. 직업에서 연유한 습관 때문인지 그는 거의 매 순간 주변의 모든 말소리를 분별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편이지요. 지금 듣지 못하는 것들이 반복될 수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섞인 아쉬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쫓던 비밀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도 그는 어느 방문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감추고자 했던 비밀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칠 줄 모르고 말하고 싶어 하고, 듣는 사람 역시 이야기 속에 한없이 빠져드는 이야기를요.

이야기의 제목인 ‘Corazón Tan Blanco’는 <맥베스>에 등장하는 구절의 스페인어 표현입니다.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맥베스는 국왕 덩컨을 살해한 후 뒤늦은 후회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피로 물든 손’은 ‘대양의 모든 물’로도 씻지 못할 거라고, 오히려 자신의 손이 ‘바다를 붉게 물들일’ 거라고 말하면서요. 그때 등장하는 맥베스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지요: 자신의 손 역시 그와 같은 색이지만,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창피할 만큼 새하얀 마음을 갖지는 않았다고요.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원문은 ‘My hands are of your colour; but I shame to wear a heart so white.’입니다. 스페인어 번역도 유사하지요. (Ya están mis manos del color de las vuestras; pero me avergonzaría de tener un corazón tan blanco.) 그래서 이 책의 영어 제목 역시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그대로 차용한 <A Heart So White>입니다. 스페인어 ‘corazón’ 과 영어 ‘heart’는 모두 마음이라는 뜻과 물리적인 심장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셰익스피어가 처음 이 표현을 사용했을 때에는 이 중의성을 염두에 두었겠지요. 맥베스가 잠든 던컨의 심장을 단검으로 찌른 뒤 피로 붉게 물든 손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My hands are of your colour; but I shame to wear a heart so white."

색채에서 빨강과 순백(so white)이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면 그것들이 각각 수식하는 ‘hand’와 ‘heart’는 중의적 대비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죄 지은 손과 무고한 마음을, 다른 한편에서는 죄 지은 손과 겁에 질린 심장을요. 그래서 <맥베스>의 한국어 역자 최종철은 해당 문장을 옮기며 ‘내 손도 당신 손(과 같은) 색깔이나, 심장은 그렇게 창피하게 창백하진 않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겁에 질린 맥베스를 보면서, 어차피 왕위에 오르기 위해 같이 공모한 일인데(내 손도 당신과 함께 피로 물들었다!), 뭘 그렇게 겁을 내느냐(하지만 내 심장은 그렇게 창백하게 질려 있지 않다!)고요.

이 구절이 흥미로운 까닭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부끄러운 게 누구인지, 새하얀 마음/창백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번역은 맥베스에게 왕위에 오르기 위한 야심과 국왕 살해를 부추기고 여러 순간 공포와 후회로 흔들리는 맥베스를 다그쳐 사건을 일으키는 맥베스 부인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a heart so white’를 지닌 것이 수치스럽다는 표현은 그녀가 맥베스를 향해 건네는 말로, 즉 새하얀 마음/창백한 심장을 지닌 것은 맥베스라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 마리아스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히려 새하얀 것은 그녀의 마음이고, 새빨간 것은 맥베스의 손이라고 주장하지요. 마리아스의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덩컨의 심장에 단검을 꽂았는지가 자명하고, (덩컨을 살해하고 돌아온 맥베스가 말하지요, ‘I have done the deed.’) ‘대양의 모든 물로도 손을 씻을 수 없으리라’는 맥베스의 탄식에 이어지는 대화에서 ‘아주 적은 물’로도 우리가 한 일을 씻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하며 그를 위로하니까요. 마리아스는 이 대화에서 그녀가 맥베스의 붉은 손과 죄책감, 두려움을 그녀 자신의 새하얀 마음에 동화 시키기 위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녀가 맥베스의 붉게 물든 손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까닭은(my hands are of your colour) 그녀의 결백함에 맥베스를 동화시켜(but I shame to wear a heart so white) 그의 죄책감을 나누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새하얀 마음>에서도 셰익스피어가 사용했던 유비가 잘 드러납니다. 권총으로 가슴을 쏘아 자살한 여인의 새빨간 모습과 비밀을 간직한 새하얀 마음 사이에서요. 이야기의 막바지에 란스는 어떤 비밀을 고백하며 동일한 사건 자체는 반복될 수 있지만, 그것을 겪는 사람과 시대는 달라질 것이므로 그것의 의미 역시 달리질 것이라는 말을 함께 전합니다.

물론 사건의 의미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의 초월적 의미만 존재하고, 개별 상황과 경험 주체는 무의미하다고 한다면 모든 죽음은 다 같은 죽음이고 모든 혼인은 다 같은 혼인일 것이며 모든 딸과 아들은 시간을 반복하여 자식의 형상을 살 뿐인 것이 될 테니까요. 혹여 실은 세상사 이치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언제까지나 의미를 위한 차이를 요구하고 창조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을 갖는다는 건 이런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차이를 위한, 자신만을 위한 무언가를 간직하는 것.

고백의 유혹과 비밀을 간직한 삶의 매혹 사이에서 ‘비밀’이라는 매력적인 관념에 더불어 살아가는 상상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맥베스>의 한 장면을 짧게 옮깁니다.

​​​

MACBETH

Whence is that knocking?

How is't with me, when every noise appals me?

What hands are here? ha! they pluck out mine eyes.

Will all great Neptune's ocean wash this blood

Clean from my hand? No, this my hand will rather

The multitudinous seas in incarnadine,

Making the green one red.

Re-enter LADY MACBETH

LADY MACBETH

My hands are of your colour; but I shame

To wear a heart so white.

(Knocking within)

I hear a knocking

At the south entry: retire we to our chamber;

A little water clears us of this deed:

How easy is it, then! Your constancy

Hath left you unattended.

2016. 6. 9. / 아름다운가게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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