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셰익스피어의 기억>


탐험의 첫 번째 국면에서 나는 셰익스피어가 되는 행운을 맛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것은 억압과 공포로 바뀌었다. 처음에 두 개의 기억은 서로의 물을 뒤섞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셰익스피어의 거대한 강은 나의 평범한 물길을 위협했고, 급기야는 거의 그 안에 휩쓸려 들어가버리도록 만들기에 이르렀다. 나는 두려움과 함께 내가 모국어를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자기 정체성은 기억에 근거하고 있는지라 나는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친구들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는 그들이 내가 지옥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것의 이면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면하고 사려 깊은 접근을 통해 이야기에 다가갈수록 이야기의 의미와 내용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보다 심층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요. 흔히 노인의 지혜를 존중한다고 할 때에는 바로 이렇게 이야기를 안다는 것, 이야기를 이해하는 능력을 존중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의 살아온 시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시간 동안 그가 겪었을 경험들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의 경험은 곧 그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었을 이야기와 다름없으니까요.

이야기는 인간사와 세상사의 가장 메타적인 언어이자 의미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장마에 강이 범람했다’라는 단순한 진술은 그 자체로 그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경계를 넘어 넘쳤다’라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뿐이지만, 강의 범람이 떠내려가는 철수네 송아지와 영희네 집을 덮친 강물로 이어질 때 인간사와 세상사의 의미가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지요. 이야기는 곧 시공간의 배치에 따른 사건의 연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쇄하는 사건은 즉각 이야기라는 특성을 갖게 되지요.

소설은 이러한 이야기의 총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소설 이외에도, 소설 이전에도 다양한 이야기의 양식들이 있었습니다. 당장 가까이에서 한국의 전통 판소리나 설화들이 그렇고 다른 민족들의 수많은 신화와 서사시들이 그렇지요. 소위 경전이라 불리는 것들도 기실 이야기의 모음에 다름 아닙니다. 논어의 매 장은 ‘공자가 이랬더라’로 시작하는 공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성서는 유태 민족의 이야기, 혹은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연대기, 우화, 교훈담 등 형식과 목적 등에 따라 나뉘는 수많은 이야기의 양식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야기가 갖는 서사성에 대비되는 시조차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장면과 이미지로 만들어진 시라손 치더라도 그 장면이 기대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둘러싼 소문이나 TV에 나오는 연예인들, 또는 주변인들의 인생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 의미의 매듭을 이루는 방식 역시 이야기라는 단위입니다.

사건이 다양한 방식, 다양한 조합으로 연쇄할 때 이야기를 이룬다면, 이야기의 묶음이 소설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소설은 이야기의 배열이라고 볼 수 있지요. 물론 그 가운데서도 특별한 배열입니다. 앞서 예로 든 논어나 성서도 일종의 이야기 배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소설과는 배열의 목적이 다르지요. 목적이 다르면 배열도 달라집니다. 물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우선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야기를 배열합니다. 그래서 공자의 일생 가운데 그가 제자들에게 전했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배열하지요. 유태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보존하고 정체성을 보존, 계승하기 위한 방식으로 선조들의 이야기를 배열합니다.

반면 소설은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해 이야기를 배열합니다. 주제가 되는 이야기, 핵심적인 이야기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지요. 어떤 이야기는 감추고, 어떤 이야기는 강조하고, 어떤 이야기는 살짝만 드러내고, 어떤 부분은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어떤 부분은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식으로요. 물론 경우에 따라 소설의 의미와 목적은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소설은 때로 서사적 긴장이나 흥미로운 묘사에 기댄 단순한 재미의 달성을 지향할 수도 있고 교훈적이거나 상징적일 수 있으며 삶의 어떤 단면을 포착하고 제시하는 발견과 인식을 겨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소설은 이야기에서 출발해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이야기를 매개로 삶에 바짝 밀착해서 얻은 수확을 다시 이야기를 통해 물고 나온다고 할까요. 때로 소설이 잠시 이야기라는 본래의 지향점을 잃는 그 순간에도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빛을 발합니다. 톨스토이가 글을 쓰다 설교자로 돌아서는 그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훈계가 아닌 그가 만든 소설의 이야기이고, 쿤데라가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에도 그의 통찰과 그의 소설은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다른 매체가 다루는 이야기와, 다른 매체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을 제 안에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이 다른 매체를 삼키는 셈이지요. 소설은 이웃의 영토를 탐욕스럽게 삼키면서 성장했습니다. 이 욕심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합니다! 소설은 필요하다면 앞서 이야기의 다른 형태로 언급했던 신화, 설화, 민담, 우화, 동화, 시까지 자신의 안에 포함할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이것을 제멋대로 재고 자르고 붙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과학적 발견이든 사회적 사건, 사고든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소설의 호기심은 사회적, 도덕적 금기나 으레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만한 주제들까지도 가만두질 않아요. 사드(Marquis de Sade)의 악명 높은 소설은 그의 이름을 가학의 일반명사로 만들었고 나보코프 소설의 주인공은 아동성애의 대명사가 되었지요.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소설은 자신의 태동기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양쪽 모두에게서요. 한편에서는 이 새로운 양식을 신세계의 발견과 같다며 옹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부터는 기존의 다른 양식들과 비교했을 때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순수함을 결여한 ‘잡탕’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종류야 어쨌든 인간은 늘 이야기의 곁에서 살아왔겠지만 그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도 ‘소설(novelle)’이라는, 이름도 이상한 새로 나온 이야기의 종류는 ‘이건 이야기는 이야긴데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새로운 장르의 이름이 ‘novelle’, ‘novel’입니다. 라틴어 ‘novellus’, ‘novus’에 유래한 이 단어의 의미는 바로 ‘새로운 것’, ‘새것’!)

이렇게 태어난 소설은 나름의 변천을 겪으며 오늘에 이릅니다. 그 사이 표현하는 양식이나 다루는 주제 등에 있어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고 소설을 이야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이름들도 등장했지요. 보르헤스 역시 빠지지 않는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소설가들과 비교했을 때 보르헤스가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그리는 세계만큼은 압도적인 크기를 드러내지요. 많은 소설가들이 현실에 천착해 이런저런 세상사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골몰할 때, 보르헤스는 자신의 상상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러면서도 보르헤스의 상상은 단순한 환상, 현실에서 유리된 가상의 세계로 빠지지 않고 현실과 아주 강력한 유비를 이루지요. 무한히 늘어나는 바벨의 도서관이 그렇고 세계를 포함하는 작은 ‘알렙’이 그렇습니다. 흔히 보르헤스의 세계를 상징하는 거울, 미로, 책, 꿈 등에서 이들 상징은 무한한 방식으로 세계를 투영하며 그것의 전체나 일부를 반사합니다. 상징들이 만드는 상상 속에서 보르헤스의 세계는 무한하게 증식하지요.

이러한 상상의 복판에 ‘기억’이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나는 작가로서보다 오히려 독자로서 뛰어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책들을 가까이에서 읽으며 지냈다는 것이지요. 보르헤스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그의 실명입니다. 보르헤스의 가계는 시력이 점차 약화되다가 상실되는 유전 질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후천적 시력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1899년 태어난 보르헤스는 1927년부터 무려 8차례나 안과 수술을 받았지만 1950년대 중반 완전히 시력을 상실합니다. 완전한 실명 이전부터 점차 악화되는 그의 시력으로 인해 그의 독서는 상당 부분 기억에 의존합니다. 자신의 책장을 손으로 쓸어 만지며 서재를 거니는 보르헤스의 모습은 유명한 일화이지요. 보르헤스가 강연이나 인터뷰 등에서 무언가를 인용할 때 드러나는 기억의 폭과 정확함은 경이적일 정도입니다. 보르헤스는 실명은 노년처럼 혼자가 되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실명을 밤에 빗대어 책과 밤을 동시에 선물한 신의 경이에 대해 시를 쓰기도 하지요.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제목이 드러내듯 어떤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단편에는 헤르만 세르겔이라는 독일인 문예학자가 등장합니다. 헤르만은 셰익스피어를 연구하고 있지요. 어느날 그는 영국의 어떤 셰익스피어 학회에 참가합니다. 그곳에서 다니엘 토프라는 사람을 만나지요. 학회 일정을 마치고 다른 일행들과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그들은 자리가 끝나자 호텔로 돌아옵니다. 다니엘이 자신의 방에서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느냐는 제안하자, 헤르만은 그를 따라 자리를 옮깁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다니엘이 헤르만에게 자신이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헤르만은 잠시 당황하지만, 농담처럼, 혹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로잡혀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받아들이겠노라 대답하지요. 다니엘이 말합니다. 기억은 억지로 얻을 수도, 만들 수도 없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만큼 헤르만에게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떠오를 것이라고요.

이튿날 헤르만은 어쩌면 자신이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갖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 아니면 평생 셰익스피어를 연구했던 자신에게 찾아온 기연, 아니면 낯선이의 장난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합니다. 무언가 셰익스피어에 관련한 내용들을 기억해보려 하다가도 이내 실패하기도 하지요.

그날의 대화는 술 취한 어느 밤의 장난이었을까요? 다시 독일로 돌아온 뒤 얼마 후, 어느날 헤르만은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다 자신에게 도무지 낯선, 고대 영어에 속하는 몇 단어들을 내뱉습니다. 대영박물관을 나오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낯선 얼굴들이 꿈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문예학자였던 그는 그들 가운데 일부를 알아보고 놀라기도 하지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동한 극작가들이나 셰익스피어의 주변인들과 같은. 몇 달이 지나고 헤르만은 점차 많은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갖게 됩니다.

처음 얼마간 헤르만은 흥분에 휩싸입니다. 셰익스피어 연구자로서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따라 기이한 행복감을 경험하지요. 그 기억들을 가지고 셰익스피어의 새로운 전기를 집필할까 생각하다가, 기억이 어떤 정황들 이상의 것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머지 않아 생깁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점차 커질수록, 정작 헤르만 자신의 기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지요. 셰익스피어의 시대와 헤르만의 시대 사이에는 약 300년의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게다가 셰익스피어가 살던 영국과 헤르만이 살고 있는 독일 역시 차이가 크지요.

헤르만은 점차 일상을 둘러싼 주변 환경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기차역에서 문득 기차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기도 하지요. 마침내 모국어인 독일어를 잊어가는 지경에 이릅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것, 헤르만 세르겔로 남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요. 결국 그는 자신이 건네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전달합니다.

정체성을 일관된 판단과 행동의 체계라고 했을 때, 이러한 일관성은 경험을 체화하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일종의 백지 상태로 출발점을 가정해도 일단 경험을 체화하는 방식이 거칠게나마 형성된 이후부터는 기존의 방식에 따라 새로운 경험을 분류하고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테니까요. 그리고 이 경험을 체화하는 방식이 쌓여 새로운 경험과 함께 기억을 이룹니다. 기억이 기억을 만든다고 할까요.

보르헤스의 짧은 단편에는 기억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관점이 녹아 있습니다. 헤르만이 처음 떠올린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어떤 장면이나 일화가 아닌 자신도 모를 어떤 낱말의 음성, 혹은 휘파람에 섞인 멜로디 같은 것들입니다. 보르헤스 자신이 시력을 잃어가며 다른 감각들에 예민해졌기 때문일까요? 시각이 인간의 감각 가운데 절대적인 역할을 차지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기억의 첫 장면을 소리에서 찾습니다.

한편 보르헤스는 기억의 정확성은 모호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대수롭지 않은 일들은 기억에서 흐릿하게 흘려버리고 중요한 일일수록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르헤스는 반대로 말합니다. 오히려 정확성이라는 게 실은 모호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요. 기억은 무언가에 대한 암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외우듯 기억을 만들지 않습니다. 무수히 접하는 자연스러운 경험 속에서 기억이 형성된다면 기억 역시 그 경험을 따라 결정을 이루겠지요. 혹은 흔하지 않은 독특하고 강렬한 경험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사진처럼 균등하고 균질하게 모든 장면을 찍어서 기억하지 않아요. 당장 기억에 남는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고 했을 때, 그 장면을 구성하는 모든 사물들, 또는 그 장면을 둘러싼 조건들을 세세히 기억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강렬한 기억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기억 가운데 도드라지는 일부분 때문이지, 그 기억을 만든 전체 장면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마치 카메라로 어떤 대상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선명하게 끌어당길수록 대상의 배경은 흐릿하게 초점을 잃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어떤 기억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의 모호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경험이 기억을 만든다고 했을 때, 모든 경험이 저절로 기억으로 이어질까요? 보르헤스는 다니엘의 입을 빌어 기억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발견은 무언가를 꼭 기억하려는 노력과는 다릅니다. 보통 이런 노력은 암기라고 칭하지요. 우리말 ‘기억’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인상이나 경험을 도로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하나의 단어가 간직하는 것과 다시 생각하는 것이라는 서로 다른 정신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사실은 영어에서의 ‘기억(memory)’이라는 단어도 비슷한 관점에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영어가 중세 불어로부터 받아들인 이 낱말의 어원은 라틴어 ‘mĕmor’입니다. 이 단어는 물론 기억에 관련한 단어입니만 몇 가지 다른 뜻들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 ‘mĕmor’는 현대어 ‘memory’에 해당하는 ‘기억하는’, ‘잊지 않는’이라는 의미 외에도 ‘고마워하는’, ‘유념하는’, ‘마음에 간직하는’ 등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도로 생각해내는 것’과 이를 위해 우선 ‘간직하는 것’의 두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낱말의 기원을 찾아가면 기억의 두 가지 특징에 도달합니다. 간직하는 것, 그리고 다시 생각해내는 것.

다니엘로부터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건네받은 헤르만은 셰익스피어 연구자답게 그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셰익스피어의 전기, 혹은 어떤 연구 저작을 서술하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은 어떤 정황이나 느낌만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었지요. 이런 맥락에서 기억은 경험의 종합이 아닌 무규칙한 혼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것으로 어떻게 의미를 엮을 것인가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한 사람의 정체성에 있어서 기억은 매우 중요한, 결정적인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이 곧 그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 번 헤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보다 중요한 것은 그 덧없는 물질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니까요. 기억이라는 덧없는 물질로 만든 작품을 삶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아닌 사람들도 자신의 기억들로 무언가를 만들며 살아가니까요.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그들의 삶이겠지요.

기억하고 있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역시 존재합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 더 흥미로울 수 있겠군요. 언젠가 이야기가 다시 돌아 기억 없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에까지 도달할 날이 있겠지요. 이야기는 타인의 기억과 접촉하는 방식입니다. 타인의 기억이 자신을 잠식하자, 헤르만은 견디지 못하고 그 기억을 버리는 편을 선택합니다.

... (중략) ...

앞서 잠깐 언급했던 나보코프는 보르헤스를 처음 읽었을 때 경이로운 현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문득 둘러보니 어디에도 집은 없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참 기억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니 기억이 있는 자리에 그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5. 26. / 아름다운가게 미아

info@labyrinthos.co.kr

#라비린토스 #labyrinthos #보르헤스 #JorgeLuisBorges #셰익스피어의기억 #LaMemoriadeShakespeare #Borges #호르헤루이스보르헤스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