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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정체성>


그날 밤 그녀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에 귀를 대었다. 고른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이 편안한 잠, 그녀가 너무도 쉽게 잠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렇게 귀를 문에 대고 오랫동안 서 있었고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느꼈다. 아마도 그녀가 가장 약하고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라고. 사실 누가 더 강한가?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영토 위에 있을 때 강한 사람은 사실 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사랑의 영토가 그들 발 밑에서 사라진다면 강한 자는 그녀고 약한자는 그다.

앞서 소개한 바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정체성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루겠습니다. 소설의 제목처럼 이야기는 줄곧 ‘정체성’이라는 열쇠말을 따라 흘러갑니다. 쿤데라가 주연으로 내세우는 샹탈과 장마르크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둘러싼 흥미로운 장면들이 펼쳐지지요.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정체성이라는 개념부터 천천히 살펴볼까요?

‘정체성’이라는 낱말에는 바를 ‘정(正)’과 몸 ‘체(體)’ 두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일본의 역자들이 선택한 이 단어에는 정체성을 대상의 올바른 모습, 마땅히 그래야 할 참 모습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녹아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의 ‘정체를 밝히다’라는 말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다’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이는 ‘본래의 모습’과 그렇지 않은 ‘거짓 모습’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일본어사전은 ‘정체(正体)’라는 낱말의 뜻을 풀이하며 ‘진실(真実)’, ‘본래의 모양(本来の姿)’이라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흔히 사회적 관계와 관련한 일본의 문화를 거론할 때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즉 진짜 속마음과 사회적 규범에 따른 체면치레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체성’이라는 낱말을 바라보는 이들의 관점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성격과 그렇지 않은 거짓 성격을 구분한다는 점에서요. 우리 역시 일상 생활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을 비슷한 의미 정도로 흔히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정체성’이라는 낱말의 기원, 일본의 역자들이 ‘정(正)’ 과 ‘체(體)’라는 두 글자를 찾기 위해 고심했을 단어는 ‘identity’입니다. 영어는 ‘identity’, 독어는 ‘identität’, 불어는 ’identité’ 라고 하지요. 이들 세 언어가 거의 동일한 단어를 가진 까닭은 이 낱말들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에서 ‘identity’라는 단어는 16세기 후반에 등장합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 낱말의 기원은 ‘identitas’, 라틴어 ‘identitas’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요. 현대 언어도 이러한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they looked identical!’, ‘저것들 정말 똑같아 보인다!’와 같은 표현이나, 생김새나 성별은 물론 유전자까지 완벽하게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를 가리키는 ‘identical twins’ 같은 표현에서 살펴볼 수 있지요. 흔히 ‘ID’로 많이 쓰이는 이 낱말의 용법 역시 신분이나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 즉 이 사람이 (등록된, 허가된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을 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identity’라는 낱말이 갖는 의미의 영토에서 정체성이라는 구역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동일성이라는 의미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체성을 갖는다’라는 것은 곧 ‘자기동일성의 유지’를 내포하기 때문이지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곧 일관된 판단과 행동의 체계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겁이 많고 소심함’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갖는다는 것은 매사에 대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여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매사에’ 입니다. 단순히 특정 상황에서 대담하게 행동하지 못한다거나 어떤 대상을 두려워한다든지 특별한 경우에 각별히 행동을 조심한다고 해서 그를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매사에, 모든 일에 일관되게 그런 태도와 자세를 보일 때 비로소 그를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즉 그의 정체성을 ‘겁이 많고 소심함’으로 정의하지요. 그렇지 않고서 언젠가는 별것 아닌 일에도 벌벌 떨다가 또 언젠가는 남들이 다 큰일이다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임에도 혼자 대범하게 앞장선다면 ‘알다가도 모를 사람’ 내지는 ‘위기에 강한 사람’이 그의 정체성이 되겠지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누군가 ‘우울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는다면 그 스스로가 계속 우울에 빠져 있든지, 아니면 그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이든지 하는 경우이지, 어떤 날은 손쓸 수 없는 우울에 깊이 빠져들다가 어떤 날은 기뻐 날뛰고 다른 날엔 목놓아 울다가 다음날엔 불 같이 화를 낸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거나 상종 못 할 사람, 혹은 일종의 성격장애에 가까운 모습이 그의 정체성이 되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위에서 살아갑니다.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겪어온 경험과 생각들, 느낌들이 모여 그의 정체성을 이루겠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정체성은 생의 총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경험의 경향과 축적된 총체성이 판단과 행동의 일관성을 만들고, 이러한 일관성이 체계화하여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 정체성이란 토대는 그리 단단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신이 믿고 있는 방식에서든, 아니면 타인이 그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든지요. 누군가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의 정체성과 다를 수 있고, 그가 실제로 지닌 정체성과 그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 역시 다를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는 누군가의 삶은 물론 그를 둘러싼 기만과 과장, 가장과 왜곡, 그의 자랑과 수치가 한 덩어리로 얽혀 있지요.

정체성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은 어쩌면 깨나 불편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위기의 순간들은 일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감췄다고 생각했던 속마음이 누군가에게 들통나는 뜨끔한 상황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는 상황들처럼 말이지요. 위기의 징후들입니다.

대체로 위기를 넘기는 방식에는 몇 가지 흔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발끈하며 그 자리에서 상황을 (혹은 대상을) 부정하기도, 왠지 부끄러워 달아나듯 그 순간을 피할 수도 있겠지요. 모른 척 눙치듯 넘어갈 수도, 아니면 돌아와서 혼자 골방에서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냥 잊습니다. 말 그대로, 잊어버려요. 수십 년 동안 켜켜이 쌓인 경험의 총체가 한두 번 고민하고 역정 좀 부린다고 어디 쉽게 바뀌거나 숨겨지거나 떨쳐지겠습니까. 그래서 정체성의 나체가 드러날지 모르는 위기의 상황은, 대개 합리화나 이런저런 핑계로 슬그머니 이를 가려 덮는 방식으로 끝나곤 합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지요, 어떤 방식으로든 도저히 외면하기 어려운 순간이. 그러고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든, 타인의 눈에 비친 정체성이든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샹탈과 장마르크의 경우처럼요.

샹탈과 장마르크는 연인입니다.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의 등장인물들이지요. 파리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은 노르망디 해변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샹탈이 장마르크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고, 장마르크는 이튿날 정오에 그곳에 도착할 예정이었지요. 샹탈은 장마르크를 기다리며 잠시 호텔 앞 해변가로 산책에 나섭니다. 해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문득 모든 남자들이 ‘아빠’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배우자와 함께 유모차를 밀고 가는 남자, 혹은 아이를 둘러업고 가는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말이지요.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바닷가에서 연을 날리거나 하면서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는데, 아무도 샹탈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놀이에 열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샹탈은 생각하지요, 세상에는 아빠가 되어버린 남자들과,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아빠들이라는, 오로지 ‘아빠’라는 종류의 남자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고요.

장마르크를 만난 샹탈은 왠지 모를 서글픔을 감추려고 부러 명랑하고 가볍게 ‘이제는 거리에서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쓸쓸함이 배어나는 목소리에 내심 당황합니다. 아마 장마르크보다 그녀가 몇 살쯤 나이가 더 많다는 사실 때문에, 언젠가 그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놀란 사람은 장마르크였습니다. 그는 ‘그러면 나는 뭐야? 나는 당신이 어딜 가나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당신은 당신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하다니 그게 말이나 돼?’라고 되묻습니다. 샹탈은 한편으로 자신을 감싸는 장마르크의 목소리에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당황스런 마음을 그에게 들킬까 염려하지요.

파리로 돌아온 뒤 장마르크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작은 장난을 준비합니다. 그녀가 여전히 다른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확신을 그녀에게 돌려주기 위해, 샹탈 앞으로 익명의 편지를 슬쩍 보내는 것이지요. 어느날 샹탈은 우편함에서 우표나 소인도 없는, 짧은 문구만 적힌 편지를 한 통 발견합니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편지를 확인하고 놀란 샹탈은 혹시 잘못 온 편지는 아닐까, 누가 보낸 편지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서둘러 편지를 없애려 합니다. 하지만 왠지 편지를 속옷장 속에 감추어 두는 편을 택하지요. 위험한 장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쿤데라는 서사의 긴장이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소설이 포착할 수 있는 통찰을, 소설이 제시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탁월하게 담아내곤 합니다. 쿤데라는 전통적으로 소설이 사용하던 서사와 묘사라는 장치를 통해 훌륭한 솜씨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가 하면, 소설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서사라는 이야기의 울타리를 허물면서 감각과 통찰과 사상을 직접 제시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러한 방식이 소설에 있어서 장르적 퇴행이 아니냐는 비판 역시 공존합니다.)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의 흐름을 따라 적절하게 배치된 샹탈과 장마르크의 이야기,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이들의 정체성, 이들 관계의 정체성, 이들이 관계를 형성하기까지 각자의 삶에서 쌓아온 저마다의 정체성에 관련한 이야기들까지, 쿤데라는 여러 이야기를 얽어서 훌륭한 서사적 얼개를 만들어 냅니다. 중간중간 자신의 육성까지 섞어가며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지요. 소설의 결말을 처리하는 방식 역시 흥미롭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두 인물의 침대 머리맡을 자신이 직접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쓰인 소설의 마지막 장은, 연애 소설의 수많은 장면 가운데 단연 손에 꼽게 낭만적인, 사랑스런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쿤데라가 그리는 이야기의 틈새에는 그 이야기를 만든 물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야기 이면의 어떤 물음과 그에 대한 쿤데라의 해석이라고 할까요. 샹탈보다 하루 늦게 해변에 도착한 장마르크는 호텔에서 그녀가 잠시 외출했다는 안내를 듣고 그녀를 찾아 거리로 나섭니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찾지요. 거리에서 다가오는 인파들과 교차하며 장마르크는 비슷한 체형, 비슷한 머리칼, 비슷한 걸음걸이들 속에서 몇 번이고 샹탈을 오인합니다. 멀리서 샹탈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다 마침내 다른 엉뚱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그를 스쳐 지나가지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그렇습니다. 그가 샹탈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은, 거꾸로 그 특징을 통해 그녀를 식별하려 할 때마다 엉뚱한 곳에서, 이를 테면 길 건너를 지나는 전혀 다른 여인의 걸음걸이에서, 인파 사이로 힐끗 보이는 어떤 신체의 일부에서, 카페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서 튀어나오곤 합니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그의 외모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일까요?

한편 호텔로 돌아와 장마르크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샹탈은 생각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크게 배어나자 당황합니다. 어떤 경험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렬한 자극을 남기기도 하고, 이럴 때 가장 내밀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신체조차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목소리의 떨림과 작은 털 하나가 곤두서는 신체의 움직임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그곳에서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장마르크는 종종 샹탈의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만나러 가곤 합니다. 그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당혹감이지요. 사무실에서 나오는 샹탈의 표정과 말투와 몸짓과 분위기가 자신이 사랑하던 그녀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장마르크는 그녀와 다시 만나 한참을 시간을 보낸 뒤에야 샹탈이 자신이 사랑하던 그 사람이라는 느낌을 회복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한참의 시간을 함께 보낸 뒤에야 샹탈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고요.

샹탈은 자신이 두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항변합니다.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지만 원하는 삶을 위해 해내야만 하는 일들 속에서, 두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요. 그녀의 웃음은 장마르크를 위한 것이지 광고회사의 속물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샹탈은 자신이 두 얼굴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두 얼굴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그녀의 얼굴일까요? 아니면 두 얼굴, 혹은 여러 얼굴을 갖는 것이 그녀의 얼굴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정체성을 갖는 것과, 혹은 그것으로 사는 것은 다른 일일지도 모릅니다. 장마르크를 만나기 전 샹탈은, 자신을 극도로 불편하게 하는 공동체적 가족의 일원인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이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그 울타리 속에서의 삶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조화롭게 그들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때로 화장실에서 원치 않는 흔적 앞에 강제로 노출되거나, 시누이 부부가 온 가족들이 들으라는 듯 침대에서 교성을 질러 댈 때도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었을 때, 온 가족들은 그들 부부에게 다시 아이를 낳으라, 그래야 잊을 수 있을 것이라며 새로 아이를 낳을 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샹탈에게 중요한 것은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것’, ‘기억하는 것’이었지요. 마침내 샹탈은 자신이 더 이상 그들과 지낼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이주를 준비하지요, 더 많은 소득을 찾아 직장을 옮기고, 살 집을 알아보는 등.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집을 나간다고, 그들을 떠난다고 밝혔을 때, 시누이는 적개심 섞인 경탄을 품고 그녀에게 ‘암호랑이’라고, ‘꼼짝도 하지 않다가 일격을 가했다’고 말합니다. 시누이의 눈에는 샹탈이 정말 그렇게 비쳤던 것 같습니다. 정말 그 가족의 구성원인 것처럼, 절대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인 것처럼요. 그들이 헤어진 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시누이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불쑥 샹탈의 아파트를 찾아옵니다. 샹탈은 자신의 오빠와 이혼했을 뿐, 우리 가족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요. (심지어 샹탈과 장마르크를 가족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지요.) 견딜 수 없었던 기억을 회상하며 샹탈은 시누이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거의 쫓아내듯이요. 그리고 다시 깨닫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이 아파트를 산 것은 자유롭고, 염탐 당하지 않고, 자신의 물건이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샹탈이 남편의 가족들과 한 집에서 생활했던 결혼 기간 동안, 또 샹탈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장마르크와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그녀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장마르크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영리한 청년이었던 그는 직업 선택의 중요성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지요. 남들을 박해하는 데 일생을 보내는 검사, 버릇없는 아이들로부터 고통 받는 학교 선생, 기껏해야 작은 편의와 엄청난 재난의 가능성을 초래하는 기술 분야, 공허하고 궤변으로 가득 찬 수다만 늘어놓는 인문과학까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낱낱이 검토한 뒤 그가 선택한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의학이야말로 인간에게 유용하고 기술 발전에 따른 폐해가 적은 이타적인 분야였으니까요. 장마르크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진로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의대 2학년 해부학 수업에서 그는 자신이 시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신체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 절망적일 만큼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지요. 기껏 숙고 끝에 결정한 선택과 자신의 정체성이 웃으며 빗겨 지나가는 순간입니다.

샹탈은 장마르크가 농담처럼 보낸 편지에 따라, 자신이 평소 싫어했던 빨간 목걸이를 기꺼이 목에 걸고 길을 나섭니다. 누군지 모를 편지의 주인공, 그녀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뒤바로’로부터 빨간색이 자신과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서는, 좋아하지도 않던 빨간색 잠옷을 산 뒤 빨간 잠옷 차림으로 장마르크를 유혹하기도 하지요. 뒤바로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혹시 언제나 자신이 자주 다니는 길가에 몸을 숙이고 있는 걸인이 아닐까 마음에, 그가 자신에게 적선을 바라며 손을 내밀 때 무려 200프랑(한화 25만원쯤 될까요?) 지폐를 꺼내기도 합니다. 샹탈이 붉은 잠옷으로 장마르크를 유혹했던 그날 밤 이들이 함께 침대에 쓰러졌을 때, 샹탈과 함께 있는 이는 뒤바로일까요, 장마르크일까요?

샹탈과 장마르크가 함께 대화나눌 때, 이들은 종종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듭니다.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내밀한 생각들 속으로요.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저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공유하지 않는 생각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같은 자리에 앉아 저마다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이들, 같은 대화, 같은 낱말에서 다른 이념을 떠올리는 이들의 관계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서로 마주 앉은 자리에 있을까요, 아니면 홀로 떠올리는 세계 속에 있을까요? 각자의 정체성도 확정할 수 없다면 이들이 맺는 관계의 정체성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긋나거나 엇갈리는 것 없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장마르크의 장난과 샹탈이 편지들을 숨겨 왔다는 것이 드러난 그날 밤, 마주 앉은 둘은 침묵 속에서 짧게 식사를 마칩니다. 그리고 샹탈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지요. 잠들 수 없었던 장마르크가 샹탈의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을 때, 그가 들은 소리는 언제나 바로 옆 가까이에서 들었던, 잠든 샹탈의 숨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깨닫지요,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에게, 샹탈에게 부여했던 정체성은 사랑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혹은 관계에 가려졌던 정체성이 모습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리저리 교차하던 정체성의 균열이 드러나는 순간. 이들이 우리에게 고민을 던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 (중략) ...

노르망디에서 파리, 런던을, 해변과 아파트와 거리와 식당과 세탁소와 묘지와 호텔을, 샹탈과 장마르크와 샹탈의 시누이와 장마르크의 친구 F와 브라타니퀴스와 를르와를, 이들 머리 속과 걸음과 손짓과 목소리를 오가며, 오늘 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답보다 답답함을 안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야기는 다음 밤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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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9. / 아름다운가게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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