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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미나는 너무나 유명한, 지중해의 낡은 신화 속 이야기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들 잘 아시죠? 이카로스, 밀랍으로 새 깃을 이어 붙여 만든 날개를 메고 하늘로 날아오른 인간, 너무 높이 날아 태양 가까이 다가간 끝에 녹아내린 날개와 함께 추락한 인간의 이야기.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준 이는 그의 아버지 다이달로스입니다. 물론 그냥 달고 나가서 날고 놀라고 준 선물은 아닙니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미움을 산 끝에 그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절대 탈출할 수 없는 어떤 미궁에 갇히는데, 이들 부자는 갇혀 있던 미궁에서 달아나기 위해 날개를 만들어 유일한 탈출구, 하늘로 날아 올랐지요.

이들을 미궁에 가둔 이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입니다. 미노스는 한번 발을 들이면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누구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궁을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당대 최고의 장인 다이달로스를 찾아가 미궁을 만들기를 명합니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가 원했던 미궁을 완성하지만 왕의 미움을 산 끝에 정작 자신도 그의 아들과 함께 그 미궁에 갇히게 되었지요.

미노스가 미궁을 만든 까닭은 미노타우로스를 감추고 가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에 거대한 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반인반수의 괴물입니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아들이자 아들이 아니기도 한데, 그의 아내인 왕비가 낳았지만 미노스가 직접 배태한 자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는 홀린듯한 착란 상태에서 황소와 교접해 미노타우로스를 낳았습니다. 그녀가 황소와 교접한 까닭은 포세이돈의 저주 때문입니다.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뭇 신들에게 바치기 위한 제물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요청했는데, 포세이돈은 신들에게 바쳐질 영예를 위해 기꺼이 제물로 사용할 황소를 미노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신이 보낸 황소를 받은 미노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그 황소는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미노스는 그 소를 자신이 취하고 대신 다른 소를 제물로 신들에게 바쳤습니다. 이에 노한 포세이돈은 그의 왕비가 황소에게 정욕을 품게 하여 그녀가 황소와 간통케 만들었고, 미노타우로스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미노스는 미궁을 만들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매해 아테네에서 공물로 바쳐진 소년소녀를 그의 먹이로 미궁 속에 던졌지요. 이들 모두는 미궁을 헤매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미노타우로스에게 잡아먹혔습니다. 훗날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궁에서 탈출에 성공합니다. 호메로스가 전하는 미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호메로스는 눈을 돌려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전하지요.)

호메로스는 크레타의 미로를 기록하며 이카로스와 다이달로스,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왕비 피시파에, 공주 아리아드네,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과 영웅 테세우스의 이름을 전합니다. 기억도 기록을 따라 이어지지요. 그러나 이카로스가 추락한 바다에는 흔적만 남은 그의 날개를 발견한 어부들이 있었을 것이고, 미궁에는 설계자인 다이달로스뿐 아니라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이 있었을 것이며, 왕비의 추문을 수근대는 백성들이 있었고 공물로 바쳐진 소년소녀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해지는 것은 일어난 것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이야기의 행간에는 감춰진 이름들, 이름 없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미로처럼 얽힌 사람들, 사건들, 상황들 속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듯이요. 누구는 ‘이카로스’라는 이름에서 그저 ‘하늘을 날다 제 욕심에 추락한 인간’만을 떠올리겠지만, 그 이름의 이면에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사실 숨어 있지도 않은 셈입니다, 그저 약간의 관심만 기울인다면.) 그리고 저는 그 하나의 이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름 이면의 수많은 이야기들, 침묵하는 무수한 이름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 그 믿음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룰 요량입니다. 우리가 함께 귀 기울였던 아렌트의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들의 이야기들을요.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정체성’입니다. 주제에 따라 여덟 편의 소설을 정했고요. 이번 세미나에서 함께 읽을 책을 소개합니다.

1.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정체성 L'identité> (5/19)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셰익스피어의 기억 La Memoria de Shakespeare> (5/26)

3. 오르한 파묵 Orhan Pamuk, <하얀 성 Beyaz Kale> (6/2)

4. 하비에르 마리아스 Javier Marias, <새하얀 마음 Corazón Tan Blanco> (6/9)

5. 뮈리엘 바르베리 Muriel Barbery, <고슴도치의 우아함 L'élégance du Hérisson> (6/16)

6. 에밀 아자르 Émile Ajar,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 (6/23)

7. 이탈로 칼비노 Italo Calvino, <보이지 않는 도시들 Le Città Invisibili> (6/30)

8. 서머싯 몸 Somerset Maugham,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 (7/7)

위의 책들을 한 주에 한 편씩 다루고자 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면 다시 한번 읽고 싶어질 테고, 아직 모르는 내용이 있다면 세미나를 통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재미에 못 이겨 찾아 읽고 싶어질 이야기들과 함께. 세미나는 5월 19일에 시작해 7월 7일까지 8주간, 매주 목요일 밤 여덟시반부터 아름다운가게 미아점에서 진행합니다.

‘이야기’라는 형식에 주목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세미나를 기반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나름의 지향점이랄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그만의 ‘결’이 있습니다. 조금 친숙한 표현으로 접근한다면 ‘쟤는 매사에 부정적이야’라거나 ‘그 사람 참 끈질기군’ 따위의 말 속에 이 ‘결’이 숨어 있지요. 똑같은 경험이라도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해결을 모색할 때,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 경험을 체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할 법한 상황에서도 왠지 끝까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렇게 한 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험을 체화하는 방식, 외부의 자극과 경험에 반응하는 고유한 무늬를 그의 ‘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문만큼 독특한 자신만의 결을 가지고 있고, 그 결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저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나 의미, 내용 따위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의 고유한 결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의 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결을 만든 이면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각자가 지닌 결을 무시하고 서로 자신의 결만을 드러낼 때, 대화와 이해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서로 다른 결들이 부딪히며 어긋나는 소음이 만남을 잠식하게 되겠지요. 이야기는 이처럼 인간이 서로의 결을 이해하고 예외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개시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평’이 필요합니다. 지평은 말 그대로 ‘발 디딜 곳’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백지 상태에서, 진공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유산에 기대고 있지요. 그래서 삶에서 누군가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은 그가 발 디딘 곳, 그를 지탱하는 지평에 의해 한정되거나 개시됩니다. 이때 이야기는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의 지평, 생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을 사고할 수 있는 사유의 지평, 행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능케 하는 실천의 지평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미나의 열쇠말로 이야기를 꼽은 까닭이지요.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안부와 함께 초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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