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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2월 12일
    • 11분

    파뉘르주가 더는 웃지 않는 날

    1949년 프라하, 모두가 노동 계급의 승리에 도취되었던 그 시절, 스무 살 청년 루드빅은 같은 학교 다니는 마르케타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루드빅의 표현에 따르면 시덥잖은 농담을 즐기는 치명적인 성향을 가진 루드빅 자신과 달리 그녀는 농담이라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웬만큼 재능도 있고 총명한 데다 젊고 예쁜 그녀에게 있어 이런 특징은 결점이라기보다 매력에 가깝게 보입니다. 루드빅 말고도 몇몇 남학생들이 그녀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무엇이든 잘 믿는 능력을 타고난 것만 같습니다. 그럭저럭 당시의 시대 정신에 잘 부합하는 특징 같기도 하군요. 그녀는 어떤 것의 ‘너머'를 전혀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저 사물 자체를 볼 뿐이었습니다. 예컨대 식물학에 대한 이야기는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지만 학교 친구들이 하는 우스운 이야기들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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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1월 21일
    • 13분

    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오늘날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뭐 꼭 우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묻는 것은 왜 우리인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왜 철학인가, 하는 물음이니까요. 그러니 철학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누구여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을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겠지요. 철학은 오늘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대의 문제를 인문정신의 위기로 진단하고 철학에서 모종의 해답을 구하려는 시도는 철이 지나 어색해진 유행처럼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하고 상투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해답이랍시고 이런 진단에 이어 인문학 내지는 철학으로 포장한 상술이 은근슬쩍 고개를 내민다면 그런가, 싶어 갸우뚱하던 고개가 도리질로 이어지기 십상이지요. 전설에나 나오는 요순의 때가 아니라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고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돌이켜보면 사람 목숨 여럿이 우습게 날아가던 시대도 실은 예사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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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0월 31일
    • 13분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들 가운데는 막상 곰곰이 따져보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분별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이런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표현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 말의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 물으면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지요. 그럴 때면 대체로 두루뭉술히 비슷한 낱말들을 늘어놓거나, 그 말의 경험적 사례를 열거하는 식으로 엄밀한 개념 정의를 비켜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원래 언어의 의미망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구체의 사물을 지시하는 표현의 경우라면 이런 모호성이 도드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과’, ‘우유’, ‘종이’ 등의 낱말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는 꽤나 가깝기 때문에, 생각보다 의미의 틈새가 넓게 벌어지지 않습니다. 사과의 경우라면 ‘풋사과’, ‘홍옥’, ‘국광’과 같이 그것의 세목을 보다 구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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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0월 25일
    • 4분

    완전한 상속의 꿈

    오늘은 쿤데라의 마지막 에세이 <만남>을 다룹니다. <만남>에서 쿤데라는 베이컨에 대한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군요. 화가 베이컨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라면 이미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들뢰즈는 아예 자신의 저술 한 권을 통째로 베이컨의 작품을 해명하는 작업에 쏟기도 했고요. (물론 들뢰즈가 이 작업을 통해 베이컨과 그의 작품을 해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베이컨의 작품에 기대어 자기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쿤데라가 베이컨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일반적으로 베이컨의 작품에 대해 알려진 사실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번 세미나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쿤데라는 에세이라는 형식을 통해 소설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놓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소설가로서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중간중간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고스란히 쿤데라 자신과 그의 작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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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0월 18일
    • 9분

    미학과 삶

    로베르토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세 인물, 클라리세와 발터, 울리히는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울리히는 클라리세와 발터 부부의 집에 방문하는데, 울리히가 이들의 집을 찾았을 때 이들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피아노 앞에 함께 앉아 연탄하는 모습은 어쩌면 퍽 다정하고 우아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울리히에게 있어 피아노는 그저 그가 끔찍할 만큼 싫어하는 요소들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는 한심한 작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울리히는 피아노 소리를 두고 ‘으르렁거리다’, ‘고함치다’, ‘울부짖다’, ‘포효하다’ 등의 표현을 사용는데, 그가 울부짖는 포효라는 표현을 그리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어느 독자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울리히의 눈에 비친 피아노의 모습은 커다랗고 흉측하게 입을 벌린 땅딸막한 우상이자 닥스훈트와 불도그 사이에서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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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0월 10일
    • 5분

    연속성의 의식

    형식이나 화성, 선율 구성 등이 베토벤의 그것과 아주 비슷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한 현대 작곡가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대단히 빼어난 솜씨로 이 곡을 완성했습니다. 만약 진짜로 베토벤이 작곡한 곡이었다면 저 유명한 베토벤의 소나타들 사이에서도 걸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요. 그러나 그 곡이 베토벤의 작품과 꼭 닮았을 만큼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현대 작곡가가 쓴 작품인 이상 누구도 그것을 걸작이라고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베토벤을 닮은 곡을 만든 작곡가에게 돌아갈 찬사 또한 베토벤이 받는 그것과 달리, 기껏해야 모방의 달인이라는 찬사 정도겠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즐거움과 감동을, 미적 쾌락을 느끼고 있을 텐데요. 똑같은 작품인데 베토벤이 만든 곡은 걸작이고 현대 작곡가가 베토벤처럼 만든 곡은 걸작이 아니라면, 작품이 자아내는 미적 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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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10월 4일
    • 5분

    스트라빈스키에게 바치는 즉흥곡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쓴 소설들의 제목을 죄다 ‘웃음과 망각의 책'으로 바꿔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밝힌 적이 있을 정도로, 쿤데라에게 웃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개념입니다. <농담>이나 <우스운 사랑들>처럼 웃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단어들을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한 경우는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의미의 축제>처럼 작품의 주제가 아무래도 웃음 가까이에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경우도 빈번하지요. 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웃음이 있겠고 뛰어 놀고 있는 아이의 웃음이 있겠지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웃음이 있는가 하면 옆에 누가 있든 남들이 뭘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는 한 무리 학생들의 웃음이 있을 겁니다. 이런 웃음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하는 냉소나 비아냥도 어쨌든 웃음이긴 하겠지요. 웃으면 복이 온다는 식으로 묻지마 행복론을 전파하는 작자가 아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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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9월 27일
    • 4분

    저 뒤쪽 어딘가에

    등장 인물을 빼놓고 소설이라는 장르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소설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의 비중이나 중요성, 또 등장 인물을 제시하는 방식이나 소설 안팎에서 등장 인물이 수행하는 기능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소설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설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소설가는 등장 인물과 사건을 통해 주제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생각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하거나 설명하는 글은 누가 보더라도 별로 소설처럼 보이지 않겠지요. 소설은 인물들의 행위를 멀리서 관찰함으로써 어떤 주제를 드러낼 수도 있고, 혹은 행위 안쪽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말과 생각을 통해 주제를 직접 다룰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 단순히 역사나 사회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닌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다면, 이러한 까닭에 그것은 언제나 인물에 관한 것,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것이 되기 마련이지요. 소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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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9월 26일
    • 10분

    플라톤, <향연>

    철학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요? 어딘가에 틀어박혀 책이나 종이 뭉치를 뒤적이며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 아니면 사람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습? 또 아니면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맹렬하게 자기 주장을 설파하고 있는 모습이나 속세를 등진 구도자의 모습일까요? 홀로 조용히 사색에 잠긴 모습이나 신중한 관찰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권력자의 지근거리에서 적당한 조언을 건네거나 고민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충고를 건네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한가요? 사람들이 철학자의 형상에서 거의 전범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런 모습들을 떠올리는 까닭은, 당연히 이런 모습들의 철학자들이 지난 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모습을, 집필에 몰두하는 칸트와 아도르노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혹은 이들 자리에 학자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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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9월 21일
    • 8분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롤링 스쿨의 이번 주제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입니다. 지난 롤링스쿨에서 ‘방법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를 보여줬던 탐구의 개척자들을 다뤘던 것처럼, 이번에는 쿤데라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사유와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쿤데라는 흥미롭고 작품을 여럿 발표한 소설가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설이 무엇인지, 또 소설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제시하는 이론가로 꼽기에도 손색이 없습니다. 쿤데라는 특히 소설이 가진 문학적 가치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바탕으로 소설이라는 형식, 소설이라는 매체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소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에 있다고 하는군요.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앞으로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하시지요. 어떤 대상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은 동시에 그것과 비교되는 다른 대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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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7월 30일
    • 3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

    긴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돌아온 슐레밀은 여관에 들러 짐을 내려놓자마자 토마스 씨의 집으로 향합니다. 토마스 씨의 동생이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항해에서 받아 돌아왔기 때문이지요. 토마스 씨는 마을에서 소문난 부자인데다가 마침 그날은 그가 사람들을 초대해 큰 연회까지 열었던 날이었기 때문에, 슐레밀은 자신에게도 어떤 보답이 돌아오진 않을까 내심 큰 기대도 가지고 있습니다. 연회에서 토마스 씨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현관 입구에서 문지기에게 잠시 제지당하긴 했지만 다행히 초대장 덕분에 연회장에는 들어갈 수 있었고, 연회장에 들어간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슐레밀은 토마스 씨에게 다가가 동생의 편지를 건넸지만, 불행하게도 연회를 찾으며 그가 기대했던 반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토마스 씨는 딱 ‘부자가 가난뱅이에게 보일 법한' 관심만을 비치면서, 편지만 건네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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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6월 14일
    • 5분

    본능과 그 변화

    본능의 발달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프로이트는 어쩐지 과학의 발전 과정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논문의 제목이 아니었다면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을 정도로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기까지 하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과학이 명료하고 분명한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발견, 생산하는 탐구의 과정을 과학이라고 본다면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틀렸다고 보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는 과학의 맨 처음, 어떤 탐구를 시작하는 출발점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지요. 프로이트의 생각에 따르면 ‘개념’에서 먼저 출발하는 과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탐구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탐구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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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6월 7일
    • 5분

    나르시시즘

    지난 시간까지 <강의>를 통해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아, 억압과 저항, 리비도, 쾌락 원칙과 자아 본능 등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청중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강의었던 만큼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줄곧 정신 분석 운동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길목들을 소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요. 경험적 사례를 제시하는 것도 설명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논증이 필요하거나 가능한 반론에 대한 검토와 반박이 필요한 경우, 또 프로이트의 주장만으로는 충분히 납득하기 어렵거나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많은 내용을 다룰 때조차 다소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한 모습도 종종 보였습니다. 세미나에서 우리는 최대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좇아가고자 노력하면서, 강의라는 말하기의 기록이 가진 특수성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강의 전체의 큰 구도 아래에서 매시간 이루어지는 한 번의 강의라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강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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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6월 4일
    • 3분

    주제와 계획

    “Le but de cet conférence consist à montrer que le temps n’est pas le fait d’un sujet isolé et seul, mais qu’il le la relation même du sujet avec autrui.”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강의의 목표입니다.” ​ 강의를 시작하며 레비나스는 먼저 강의 기획을 소개합니다. ‘주제와 계획’이라는 소제 아래 레비나스는 시간이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강의의 내용을 이룰 것이라고 밝히지요. 우리 손에 들린 <시간과 타자>라는 텍스트는, 레비나스가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진행했던 강의의 기록입니다. 레비나스가 당초 원고의 발표나 출판을 목적으로 진행했던 강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의 저작으로서 꼼꼼하고 체계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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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5월 25일
    • 6분

    전이

    지난 시간 신경증과 리비도의 퇴행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지요. 현실에서 쾌락과 만족을 획득하지 못한 리비도는 만족스러웠던 과거의 상황, 혹은 대상을 향해 퇴행할 수 있는데, 그러한 퇴행이 의식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때, 즉 의식이 자아의 이러한 퇴행적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고 외면할 때 억압된 만족은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뼈대만 간단히 추린다면 현실에서의 만족의 좌절과, 이에 따른 리비도의 퇴행과, 그러니까 퇴행을 통한 특정한 상황이나 대상으로의 회귀와, 회귀 이후의 만족과, 퇴행적 만족에 대한 거부감과, 만족과 거부감의 혼재와, 이에 대한 자아의 억압이 증상이라는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도식은 어디까지나 참고를 위한 발판에 불과합니다. 즐거움은 뼈와 살 양쪽 모두에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리비도 본능과 자아 본능을 구분하고 있는데,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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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5월 17일
    • 5분

    퇴행과 증상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경증은 기본적으로 리비도의 발달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합니다. (물론 어떤 증상을 이론적으로, 또 임상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별히 예민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충동의 발달 과정에서 리비도는 특정 단계에 고착되거나 특정 단계로 퇴행할 수 있습니다. 발달 과정에서 충동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채 특정 단계에 멈춰버린 것을 고착이라고 한다면, 발달 과정을 거친 이후에 발생한 문제로 인해 과거의 어떤 단계로 충동이 회귀하는 것을 퇴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착과 퇴행 가운데 프로이트가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퇴행인 것으로 보입니다. 프로이트는 퇴행을 두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초기의 리비도가 관심을 가졌던 특정한 대상으로 퇴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기 자체로 충동 전체가 퇴행하는 것입니다. 대상으로의 퇴행은 특정 시기에 리비도를 만족시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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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5월 3일
    • 5분

    저항과 억압

    프로이트의 경험에 따르면 그를 찾아온 환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과거의 어느 특정한 부분에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현재나 미래에서는 소외된 채, 마치 빠져나올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의 어느 지점에 자기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보였다고요.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들의 이러한 특징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 이미 알려진 바 있는) 외상성 신경증(traumatische neurose)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고 일단 언급합니다. 그리고 강의에서 이제까지 다루어 온, 자발적인 신경증(spontane neurose)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한 일반적인 신경증에도 외상성 신경증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덧붙이지요. 프로이트는 우선 현재로서는 외상성 신경증의 원인과 특징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서를 붙인 다음,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외상성 신경증의 바탕에는 사고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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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9년 4월 27일
    • 5분

    정신분석과 정신 의학

    러시아의 소설가 스트루가츠키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라는 작품은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중 인물 말랴노프는 천문학자인데, ‘확산된 은하 물질에 대한 별의 반응’이라는 논문의 발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논문을 아직 발표하지도 않았음에도 대단히 놀라운 연구 성과가 논문에 담겨 있다는 것이 동료 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지면서 그가 논문을 발표하기만 하면 노벨상쯤은 당연히 그의 몫이 되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논문 발표를 앞두고 있는 그에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머리에 떠오른 공식을 정리해서 공책에 옮겨 적으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매번 전화가 걸려오는 통에 좀처럼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번잡한 낮 시간을 피해 조용한 밤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고 연구를 진행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과 별 관련도 없는 이상한 방문객들이 그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하고요. 밤에 불쑥 그를 찾아왔던 이웃집 물리학
    조회수 18회댓글 0개
    K
    • 2019년 4월 12일
    • 4분

    소원 성취

    … (중략) 정신분석에 있어 꿈이 갖는 의미와 꿈의 여러 특징들을 살펴본 뒤 프로이트는 이제 꿈-작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다루고자 합니다. 꿈의 ‘소원 성취(wunscherfüllung, wish-fulfilment)’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낱말에서 바로 드러나듯이 소원 성취란 말 그대로 꿈-작업을 통해 원했던 어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면을 방해하는 내외부의 자극에 대응하는 정신의 활동을 꿈이라고 파악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낮 동안에 충족되지 않았던 소망들이 꿈-작업을 거친 뒤 외현적 꿈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어린이의 꿈처럼 충족되지 않은 소망과 외현적 꿈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쉽게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꿈이 그런 것처럼 꿈-작업 이전의 본래적 요소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 해석의 본래 의미는 감춰진 어떤 것을 찾는
    조회수 53회댓글 0개
    K
    • 2019년 3월 22일
    • 6분

    실수 행위들

    사람은 때로 실수를 합니다. 큰 실수나 작은 실수, 치명적인 실수나 바로잡을 수 있는 실수, 남 보이기 부끄러운 실수나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실수 등 실수의 종류도 다양하겠지요. 혹은 말실수나 숫자를 잘못 셈하는 경우, 계단에서 발을 헛딛는 경우나 어딘가에 우산을 깜빡 놓고 나오는 경우처럼 실수를 구분하는 방식도 다양할 수 있겠군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연구의 대상으로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실수 행위입니다. 프로이트를 따라 실수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강의의 순서에 관련한 이야기를 언급해두는 편이 좋겠군요. 강의의 순서와 프로이트의 연구 내지는 그가 탐구한 주제들의 순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1915년 3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약 2년에 걸쳐 진행한 전체 강의에서 개별 강의의 주제나 내용이 꼭 연대기 순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연구자로서 프로이트가 가장 먼저 주목한 주제는 실수 행위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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