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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1월 30일
    • 6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정리합시다. 고독에 대한 언급으로 블랑쇼는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릴케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완벽하게 밀폐된 과일 속에 있는 씨앗처럼 홀로 고독하게 있다'는 릴케의 고백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당연하게도 고독은 홀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릴케가 작업의 고독을 이야기할 때, 블랑쇼는 릴케가 진짜로 혼자 있는 것인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찾아내지요. 릴케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작업 속에서 작품과 함께 있는 것이다, 설령 그 작품이 아직 온전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릴케는 홀로 글쓰기에, 오직 글쓰기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몇 주 간 거의 입도 열지 않은 채 글만 붙들고 있지요. 누가 봐도 고독한 작업이라고 할 만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블랑쇼의 생각은 다릅니다. 릴케는 작품과 함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정되지 않은 어떤 것이지요. 작품이 아직 한정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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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1월 23일
    • 5분

    미래와 예술에 관한 질문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긴 논의 끝에 쓰는 것과 읽는 것의 관계를 다루었으니, 이제 그것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블랑쇼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물음은 바로 미래와 예술에 대한 질문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쉽게 결론부터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읽는다는 것이 어떤 행위인가, 읽는다는 행위는 정확히 무엇을, 어떤 것을 뜻하는가를 살펴본 우리도 서두를 필요도, 서두를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독서는 정보와 전혀 무관하다는 블랑쇼의 말을, 진정한 독자는 결코 책을 향해, 저자를 향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질문을 허용하는 책은 독자가 읽기도 전에 이미 모든 의미가 결정된 책입니다. 오직 문학이 아닌 책들만, 이미 결정된 의미들로 짜여진 조직망으로서, 이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의 연속으로서 독자 앞에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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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1월 16일
    • 6분

    "나사로야, 바깥으로 나오너라."

    버지니아 울프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 책에 다가가면서 때로 우물쭈물하고 때로 빈둥거리고 때로 꾸물거린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차후에 어떤 거래든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이전에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일이 있다.”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남아 있다고, 책을 이렇게 읽든 저렇게 읽든 간에 마지막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고 그녀는 말하지요. 어쩐지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군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과 생애를 알고 있으므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말하는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블랑쇼처럼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책'을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그 책은 바로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아마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 접한 적이 있겠지요. 대문호가 비장하게 소개하는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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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1월 9일
    • 4분

    밤, 그리고 또 다른 밤

    블랑쇼는 마치 과일 속의 씨앗처럼 밀폐된 고독 속에 머물고 있노라는 릴케의 고백을 인용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블랑쇼가 불러내는 릴케와 카프카, 말라르메 등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가 이끄는 <문학의 공간>으로 들어왔고, 단순히 홀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 고독에 대해, 불가능한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자기자신에 대한 부정과 의심을 토대로 쌓아 올린 견고한 확신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한편으로 많은 것들이 드러났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 짧지 않은 논의의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문학의 정체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수수께끼의 정체가 한마디 정답으로 쉽게 풀리지 않는,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우리가 통과한 여정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블랑쇼는 릴케의 경험을 언급하며 예술에 이르는 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단언합니다. 작품은 노고와 실천과 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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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1월 2일
    • 7분

    릴케와 죽음의 요구

    이스탄불 출신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은 30년이 넘도록 글을 써 왔지만 글을 썼다, 라는 표현보다 소설을 썼다, 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30년이 넘도록 소설을 써 왔다, 라는 표현을요. 하지만 그가 스스로 밝히듯이 이 말은 앞의 표현에 비해 썩 정확한 문장은 아닙니다. 실제로 파묵은 그 시간 동안 소설뿐 아니라 수필이나 논평을 포함해 다양한 종류의 글을 발표했고, 또 발표하지 않은 원고나 작품, 원고로 묶이지 않은 다양한 유형의 글들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그가 쓴 것은 분명 글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모든 사정과 불충분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설을 썼다, 라는 표현을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자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1964년 12월 푸코는 벨기에 브뤼셀 소재의 한 대학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가합니다. ‘문학과 언어’라는 제목의 컨퍼런스였지요. 발표자로 나선 푸코는 청중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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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0월 26일
    • 5분

    밤의 경험

    지난 시간 블랑쇼는 문학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물음이 되는 순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물음으로 삼는다는 것의 의미는 의외로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자신을 물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해서 묻는 것, 나는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니까요. 어떤 대상에 대한 물음과 해답은 일종의 주술관계, 그러니까 주어와 술어가 결합한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 해서 ‘나’의 경우를 예시로 사용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나는 사람이고, 여성이고, 회사에 다니고 있고, 포도를 좋아하고, 낯선 장소를 싫어하고, 하는 식의 해답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나'라는 주어가 ‘사람이다’, ‘여성이다', ‘회사원이다’ 등의 술어와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을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한다면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 주어 ‘나’라는 개념이 ‘사람', ‘여성', ‘직장인’ 등의 개념과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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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0월 19일
    • 6분

    가능한 죽음

    왜 글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서도 분명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구든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겁니다. 쓸 수는. 하지만 문학에 대해서라면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그렇게 쓰인 것이 문학인가, 누구든 언제든 뭐든 쓰기만 하면 전부 문학인가, 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석연찮은 기분이 어쩐지 고개를 들지요. 아무개가 종이와 연필을 들고 어찌어찌 적어낸 일기장과 베르테르의 편지 뭉치 사이의 차이는 그저 독자가 느끼는 재미나 감동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간이나 후대의 평가에 달린 일일까요? 블랑쇼는 문학이 물음이 되는 순간이 바로 문학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문학의 물음은 문학을 가혹하게 분석해서 작품들 가운데 어떤 공통의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덧붙이지요. 쓴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학적 글쓰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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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0월 12일
    • 5분

    문학의 공간과 작품의 요구

    앞서 블랑쇼는 고독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작가의 작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달한 고독과 작업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서 다시 출발해, 문학의 공간이라는 어떤 영역을 발견하고 여기에 접근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자, 블랑쇼는 다시 묻습니다: 여기는 어디인가? 이 지점은 어떤 곳인가? 이 지점에 대해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가? 블랑쇼는 먼저 언어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블랑쇼가 문학을 다룰 때 언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의미는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도, 또는 일반적인 기호학에서 정의하는 언어의 의미와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지요.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제시하는 이 지점의 몇 가지 특징을 먼저 짚어봅시다. 그가 제일 먼저 언급하는 특징이 바로 언어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의 공간에서) 언어는 우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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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10월 5일
    • 4분

    말라르메의 경험

    작가와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작업’이라는 활동의 본질을 다루기 위해 릴케를 소환했던 블랑쇼는 이제 본격적으로 문학의 공간을 구획하기 위해 말라르메를 불러냅니다. 앞 장에서 블랑쇼는 ‘본질적 고독’이라는 개념을 통해 홀로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는 작가의 모습,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의 이러한 이미지에서 고독과 몰입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업자는 작업의 과정에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것’이 그와 그의 작업에 깊게 관계하고 있음이 드러났고요. 블랑쇼에 따르면 글쓰기는 이 ‘어떤 것’의 부름을 긍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 수 없음에도 그것의 부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매혹과도 같습니다. 아니, 일종의 매혹이라기보다 차라리 가장 순수한 매혹 그 자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군요. 좋은 부분도 있고 좋지 않은 부분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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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9월 28일
    • 5분

    본질적 고독

    오늘 밤은 지난 시간 살펴본 죽음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블랑쇼의 언급에서 출발합시다. 죽음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자명하고 뻔한 사태를 촘촘히 분석하면서, 블랑쇼는 죽음은 불가능하다, 특히 나의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죽음과 마주칠 수 없다, 죽음에 한없이 가까이 접근하는 그 순간에도 살아 있는 나는, 살아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절대로.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과 정반대로, 블랑쇼에 따르면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고 비인칭의 죽음입니다. 나는 절대로 나의 죽음이라는 결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나의 행위를 완료할 수 없고 완료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즉 죽음의 본질은 나와 죽음이 동시에 사라져가는 사태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기획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이자, 영원히 도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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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 2018년 9월 21일
    • 5분

    블랑쇼의 방법들

    롤링 스쿨의 두 번째 주제는 모리스 블랑쇼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함께 읽습니다. 얼핏 생소한 이름인 것 같지만 블랑쇼는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처럼 이름도 쟁쟁한 동시대 철학자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던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상가입니다. 특히 그가 문학을 중심으로 펼쳐놓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군데군데 까다로운 요소들이 있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블랑쇼는 다양한 유형의 문학 작품들을 섬세하게 검토하면서,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또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무엇인지 끝없이 성찰합니다. 탐구 대상을 추적하는 블랑쇼의 방법이 갖는 의미는 비단 문학과 예술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차츰 살펴보도록 하지요. 블랑쇼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문학을, 문학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블랑쇼 이전에도, 이후에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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