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대화

이런 이야기들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쓸모가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아주 어렵습니다. 대화나 대담을 통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개 질문을 받을 때면 설령 그 질문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엄밀히 말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 채로, 그러니까 실은 그들 자신 나름대로 멋대로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라면 내가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 당연합니다. 질문이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꾸며지는 것입니다. 대개 질문은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수집한 자료들로 꾸며집니다. 그러니 그런 꾸며진 질문을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할 말이 별로 없는 것은 사실 당연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문제를 구성하는 기술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해답이 정해지기에 앞서 문제 자체 내지는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화나 토론은 이런 기술과 무관합니다. 대화나 토론은 고작 한두 가지 주제를 성찰하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성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화 따위는 고작 그 성찰에 있어서조차 부족한 것이지요. 또 대화와 토론에는 으레 반론이 연달아 등장하는데, 사실 반론은 더 나쁩니다. 누군가 내게 반론을 제기할 때마다 나는 그저 알겠다고 얼른 대답하고서는 차라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반론으로는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질문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요. 질문에 있어서 질문 자체보다 그러한 질문을 만들어내는 욕망이 더 중요하듯이 반론에 있어서도 반론 자체보다는 반론을 만들어내는 의지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반론을 제기하거나 반론에 응수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질문에 대해서도 그것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지겹게 되풀이하는 방식으로만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묻고 또 물으면 답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해결책을 만들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질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질문으로 돌아와 거듭해서 질문을 던지고 같은 질문을 거듭해서 또 묻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결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움직임은 항상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납니다. 그러니 벗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벌써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지요. 질문은 일반적으로 과거나 미래를 향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묻거나 일어날 일에 대해 묻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여기에는 이미 지금도 소리 없이 작동하는, 거의 지각하기 어려운 생성들이 존재합다. 질문의 쳇바퀴를 따라 돌면서 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이 물어야 할 것들 즉 지금 발생 중인 생성을 번번이 놓치고 맙니다.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발생 중인 생성의 연속 혹은 불연속을 이해하는 것, 미래의 발생을 묻는 것이 아니라 발생 중인 생성을 지각하는 것이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생성이란 우리가 가장 지각하기 어려운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삶으로만 아우를 수 있고 스타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작용들입니다. 삶의 양태를 일부러 선택해서 고를 수 없듯이 스타일 역시 구성과는 무관합니다. 스타일에서 중요한 것은 낱말도 문장도 리듬도 아닙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역사나 근원이나 결과가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한 단어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다른 어떤 단어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고르거나 고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단어를 찾아 그 자리에 대신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누군가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즉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때로는 불가피하고 얼마든 교체할 수 있는 이러한 우연하고 임의적인 선택들로 이루어진 스타일입니다. 만약 모두가 이런 노력을 기울인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더 이상 서로 질문을 던지거나 서로에게 이의를 제기할 이유도 없어질 겁니다. 무언가를 위해 정확한 말이나 적합한 말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기 위한 부정확한 말들만이 있을 뿐이지요.

 

스타일은 상징과 무관합니다. 스타일은 시니피앙의 연쇄를 따라 움직이는 의미의 체계가 아닙니다. 혹은 깊은 성찰에서 만들어지는 조직과도 다릅니다. 저절로 생겨나는 영감이나 악단의 조화로운 연주도 아닙니다. 스타일은 하나의 배치, 발화 행위들의 배치입니다. 스타일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더듬거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왜냐하면 꼭 그렇게 말을 더듬을 필요성이 꼭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구체적인 표현을 더듬는 것과는 다릅니다. 언어활동 자체를 더듬거리기, 모국어를 쓰면서 이방인으로 머물기, 자연스러운 이탈 경로를 발명하기, 결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곳에서 사람들이 생각한 길을 따라 사태가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 속에서도 복수의 언어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언어 내부에 소수성을 지녀야 하고 모국어를 소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단지 여러 언어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똑같은 말을 모국어로도 표현할 수 있고 영어나 독일어, 혹은 소수 민족의 언어나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고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들 이것은 다언어주의가 아닙니다. 요컨대 단순히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다언어주의와 무관합니다. 다언어주의란 무엇보다 하나의 언어 안에 도주선과 변이들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말을 쓰면서 이방인처럼 말하는 것이지요. 일찍이 프루스트는 ‘위대한 문학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매 단어에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부여하는데 이는 종종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까지 하는 오역이다. 하지만 위대한 문학에서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오역들이 아름다움으로 귀결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오역이든 괜찮습니다. 단, 그 오역들이 해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의 사용법에 관련되어, 책의 사용법을 증가시키고, 독자의 언어 세계 내부에서 새로운 언어의 사용법을 만들어낸다는 조건 속에서 그렇습니다. 좋은 책은 외국어로 쓰여 있습니다. 이것이 스타일의 정의입니다. 스타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이해나 해석이 아니라 그러한 스타일로 생성되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흉내내거나 누군가의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라 그가 되는 것이지요. 새로운 힘,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새로운 힘과 새로운 무기는 왜 필요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오르지만 우선은 사유의 권력 기구라는 장치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모든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사유조차 자신의 권력 기구를 갖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이해하거나 뭔가를 실행하기 위해, 혹은 그에 앞서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우리는 사유를 필요로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유 깊숙한 곳에까지도 권력의 앞잡이들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철학에도 압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플라톤과 데카르트, 칸트와 하이데거와 그들에 관한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지 않고서 어떻게 사유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으며 협박을 일삼습니다. 이것은 스타일이라는 문제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러한 접근은 오히려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칸트와 하이데거라는 고유한, 그러므로 소중하기까지 한 스타일들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듬거리는 이들의 말을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모국어의 품으로 안전하게 회수하는 일은 모국어의 전제적 권력을 보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밑바탕에는 모국어에서 이방인들을 몰아내려는 편집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지요. 책 읽기라는 경험 속에서도 끝까지 처음의 자기 자신이기를 고수하는 것인데, 가장 나쁜 읽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실은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칸트와 하이데거를 읽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독서가 중요한 까닭은 그들이 어디까지나 이방인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들 이방인의 말을 따라서 우리 또한 이방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더듬거리는 말을 따라 우리 또한 우리의 언어에 새로운 도주선을 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라고 불리는 어느 어처구니없는 무리들은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칸트와 하이데거를 읽지 않고서는 사유를 시작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전문가 집단을 이루고 전문가들을 양산하며 전문가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전문성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사유라는 모종의 전문성으로부터 등을 돌리게끔 만듭니다. 플라톤이 되기 위해서 플라톤을 읽는 것과 플라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플라톤을 읽는 것은 비교조차 성립할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른 일입니다. 데카르트처럼 사유하기 위해서 데카르트를 읽는 것과 데카르트 전문가로서 행세하기 위해 데카르트를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이들 양쪽 모두 일단은 읽기는 하겠지만 실은 정반대로 읽고 있는 것이지요. 생성을 위한 독서와 생성을 은폐하고 봉쇄하기 위한 독서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이항기계는 사유의 권력 기구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오늘날의 이원론은 더 이상 단일성을 목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즉 ‘둘 중 하나’라는 슬로건의 목표는 단순히 어떤 하나에 도달하는 것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도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원론의 목표는 연속적인 선택에 사람들을 가두는 것입니다. 백인인지 흑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등처럼 임의의 기준에 따라 나뉜 질문들이 있으며, 이러한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계속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항기계가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모든 대답은 미리 형성된 질문을 통과해야만 만들어집니다. 마치 질문과 선택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파악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마술 트릭과도 비슷합니다. 마치 ‘당연한 결말인 것처럼’ 마술사는 당신이 고른 카드를 찾아냅니다. 마술사는 당신에게 빨간 카드가 좋은지 아니면 검은 카드가 좋은지 묻습니다. 당신이 빨간 카드를 선택했다면 그는 당신 모르게 검은 카드를 감출 겁니다. 그리고는 하트가 좋은지 다이아몬드가 좋은지 묻겠지요. 당신의 선택에 따라 그는 이번에도 교묘하게 카드를 감추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겁니다. 마지막 한 장을 찾을 때까지요. 그런데 이렇게 찾아낸 카드가 정말로 당신이 생각했던 그 카드일까요? 당신의 생각과 선택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정신분석은 이러한 트릭의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만합니다. 정신분석은 당신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이항기계를 작동시킵니다. 더 나쁜 것은 그가 제시하는 질문들이 실은 교묘한 의도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고추잠자리에 대해서 말하면 분석가는 당신의 고추와 잠자리에 대해 묻습니다. 당신이 이번 휴가에 다녀올 여행지에 대해 말을 해도 분석가는 당신의 유년기와 고향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이 사소한 오해에서 빚어진 직장 동료와의 다툼을 이야기해도 분석가는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묻습니다. 환장할 노릇이지요. 물론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분석은 실제로 작동하고, 유효한 효과들을 실제로 만들어내며, 증상에 관련한 어떤 작용들을 실제로 일으킵니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분석가의 의자에 환자를 붙들어 묶어야 하고 이항기계의 작동 속으로 환자의 삶과 사고를 고정시켜야만 합니다. (라캉은 이 사실을 아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정신분석은 아주 냉정한 기획입니다. 환자가 입 밖으로 꺼내는 모든 것들을 눌러 부수고, 오직 핏기 없는 여분만을 중요하게 다루며 환자가 말하는 자신의 욕망, 그의 경험과 배치, 사랑과 증오 모두를 분석을 기준으로 편집합니다.

 

자, 어떤 종류의 철학이 그렇듯 정신분석 역시 마찬가지로 지식의 이미지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자 합니다. 앞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딱 두 사실만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이 욕망의 생산을 전부 파괴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발화체의 형성을 모조리 박살낸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파괴를 통해 정신분석학은 배치의 두 측면, 즉 욕망의 배치와 발화의 배치를 모두 파괴합니다. 물론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많이 언급합니다. 심지어 무의식을 밝혀내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마치 악령을 몰아내듯이 무의식의 세계를 축소하고 파괴하기 위해서만 무의식을 언급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적으로 규정되기까지 하지요. 프로이트는 ‘Wo es war, soll Ich werden’이라고 말합니다. 영역하면 ‘Where it was, shall I be’, 우리말로 옮긴다면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가야 한다’ 정도로 풀어낼 수 있겠지요. ‘해야만 한다’라는 이 기묘한 윤리적 의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의 생산이나 형성을 말한다면 이는 여러 가지 증상과 장애, 기능 이상, 다양한 갈등, 타협과 말장난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욕망 또한 여기에 해당하지요. 정신분석학이 볼 때 이 욕망은 언제나 지나치게 많습니다. 프로이트의 해괴망측한 글에는 뭔가를 물고 빠는 행위들이 진짜 욕망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고, 뭔가 다른 것을 숨기고 있다는 식의 설명이 등장합니다. 담배든 사탕이든 은유나 환유를 통해 어떤 것이 다른 것을 상기시켜야만 하는 것이지요. 정신분석학은 점점 더 키케로의 웅변조를 닮아 가고 그곳에서 프로이트는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로마인으로 추대 받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진짜 욕망과 가짜 욕망을 나누는 진부한 구별을 만들기 위해 거기에 딱 맞는 격자를 발명해 이로써 욕망을 재단합니다. 이를테면 욕망의 진정한 내용은 부분 충동이나 부분 대상이고, 욕망의 진정한 표현은 다른 표현들을 구조화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거세, 또는 죽음 충동 등이라는 가설을 제시하면서 말입니다. 욕망이 자신의 바깥을 향할 때마다, 생성과 관련하여 어떤 배치를 이루자마자 사람들은 재빨리 그 배치를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해 보면서요. 다시 말해 내가 도달해야만 하는, 그것이 있었던 어떤 자리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뒤집어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무의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생산해야 합니다. 무의식은 억압된 기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환상과도 아무 관련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적인 어린 시절의 블록들을 가지고 ‘어린 아이-되기’라는 배치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숨겨 놓았던 태반 조각들을 재료 삼아 지금 그들의 위치에서 뭔가를 만들고 배치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 깨고 나온 알이나 그 알을 낳은 부모나 부모에게서 끌어낸 이미지들이나 생식 구조 따위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도 아니고 무의식이 아무 데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언, 농담이나 재담, 심지어는 꿈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의식은 우리가 제조해서 흐르도록 만들어야 할 하나의 실체이자, 정복해야 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간입니다. 욕망에 앞서 대상이 선행하지 않는 것처럼 욕망이 없다면 주체 또한 없습니다. 욕망은 기호들의 체계이며 기호들의 흐름을 통해 드러나는데, 대상과 주체의 위치는 이 흐름 속에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기호들을 가지고 사회적 장 안에 무의식의 흐름들을 만들어 놓습니다. 욕망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흐름들을 문제 삼지 않고서는 어떤 곳에서 부화하지 않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현행적인 상태보다 더 많은 연결과 접속과 배치를 원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전복적인 잠재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이런 연결과 접속과 배치의 가능성들을 전부 차단하고 꺾어 버릴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정신분석이 발화의 배치를 방해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발화에 앞서 발화의 배치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그러니 발화 행위의 주체를 찾아서, 주체를 기준으로 발화 내용의 의미를 파악하려 드는 것은 완전히 도착적인 접근인 셈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는 것이지요. 최고의 해석자인 양 그 많은 논리로 거들먹거리는 정신분석학은 부정관사와 부정법, 고유 명사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는 어떻게 해서든 부정사들 이면에서 한정사와 소유사를 발견하고 싶어 하고, 그것들에 인칭을 덧입히고 싶어 합니다. 멜라니 클라인이 맡았던 아동 상담의 사례들은 정신분석학이 부정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아이들이 ‘배’, ‘사람들은 어떻게 자라나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이를 ‘내 엄마의 배’, ‘나는 아빠처럼 클 수 있을까요?’라고 듣습니다. 아이들이 ‘히틀러 같은 사람’이나 ‘처칠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그 말에서 ‘나쁜 어머니’나 ‘좋은 아버지’ 같은 소유 관계를 발견합니다.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하기 전 언젠가 그에게 자신이 꾸었던 꿈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해골 더미에 관한 꿈이었지요. 융의 이야기를 들은 프로이트는 융이 어떤 사람의 죽음, 아마도 아내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당황한 융은 설령 해골이 죽음을 가리킨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 있었다는 사실을 프로이트에게 거듭 주지시켰지만 프로이트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사실 프로이트는 해골의 개수뿐 아니라 늑대 무리의 등장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흔히 ‘늑대인간’으로 알려진 사례에서도 프로이트는 환자가 기억을 형성하기에 훨씬 앞선 유아기에 부모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과 그가 늑대의 꿈을 반복해서 꾼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이지, 그의 꿈에 언제나 예닐곱 마리의 늑대 무리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설령 주의를 기울였다고 해도 어차피 늑대들을 뭉뚱그려 아버지의 대리 표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했을 테지만요. 꼬마 한스의 사례에서도 역시 프로이트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한스의 사례는 유아기 성적 발달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한스가 말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공포증에 빠진 까닭은 소년이 엄마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향한 엄마의 사랑을 빼앗아 가는 듯한 동생에 대한 질투와 애정 때문입니다. 여기에 엄마와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 감정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환되어 말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번에도 역시 프로이트는 부주의합니다. 많은 것들을 놓치고 말지요. 한스가 겁에 질렸던 거리, 주변의 건물들, 인접한 창고, 마차, 넘어진 말,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남자가 이루는 배치, 거리로 나가는 것을 금지 당했던 한스의 상황 등에 대해 프로이트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말은 아버지라는 점, 그것이 전부입니다. 프로이트가 그랬듯이 주어진 배치 속에서 한 부분만을 발췌하거나 한 순간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욕망과 생성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상상적인 유사 관계나 상징적인 유비가 은근슬쩍 욕망의 배치를 대체합니다. 그러는 사이 실재적 욕망은 이미 전부 사라졌지요. 사람들은 욕망이 있어야 할 자리를 하나의 코드로 대체하고, 코드가 만드는 허구적 위치에 주체를 옮겨 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코드와 허구만이 남게 된 것이지요.

 

이쯤에서 욕망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언급해야겠군요. 대표적으로 세 가지 오해 정도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욕망을 결핍이나 법칙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욕망을 자연 그대로의 실재, 자연 발생적인 실재로 보는 관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욕망을 쾌락과, 특히 아주 향락적인 쾌락과 연결 짓는 관점이 있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그것이 만들어지는 판 위에서 배치되고 꾸며집니다. 방금 언급한 이 판 자체 또한 욕망과 별개로 존재하는 어떤 장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판 역시 욕망이 배치하고 꾸미는 것과 동시에 저절로 구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이 역사적으로 규정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적 규정은 언제나 어떤 법칙이나 원인의 역할을 맡을 구조적 심급에 호소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그로부터 욕망이 생겨난다는 관점이 뒤따라 나옵니다. 하지만 욕망은 하나의 배치 속에서 매순간 서로 뒤섞이는 관계항들 그 자체입니다. 욕망을 이끄는 것, 혹은 우리를 욕망하도록 이끄는 것은 절대로 결핍이나 결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제된 배치에서 결핍을 느끼지만 우리를 포함하는 배치에 대해서는 욕망을 느끼니까요. (시대가 한참 지났음에도 『향연』의 통찰은 이 지점에 대한 변함없는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여타의 진정한 철학적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요. 가르침보다 마주침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군요. 저마다 하나의 마주침을 표현하고 있는 철학들은 그러므로 그 자신만의 마주침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계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흔히 사람들은 기계라고 하면 유기적 기계 장치를 떠올립니다. 유기적 기계 장치란 종속항들끼리 이루는 긴밀하게 연결 시스템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기계에 대한 매우 통속적인 이해에 불과합니다. 반면 우리는 기계를 이질적 독립항들끼리 이루는 근방의 집합으로 정의합니다. 꼭두각시 인형극을 떠올려 볼까요? 인형극에는 손발과 사지관절, 머리와 턱 등에 각각 연결된 실을 조작해서 다양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형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기계는 꼭두각시 인형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형 그 자체뿐 아니라 인형과 인형에 연결된 실, 실을 쥐고 인형을 움직이는 조작자, 인형이 놓이는 무대 등을 모두 포함해서 하나의 기계로 봐야 합니다. 인형이라는 기계, 혹은 일종의 기계 장치인 인형이 아니라 ‘인형극-기계’인 셈이지요. 인형극-기계를 중심으로 상이한 독립항들의 집합이 만들어집니다. 다시 말해 인형극이라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사람의 조작이 인형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형의 특성은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의 조작 방식을 통제합니다. 사람과 인형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 연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 인형은 인형이지요. 인형극이라는 기계를 통해 이질적인 독립항이었던 사람과 인형이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계입니다. 그리고 이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이동 속도입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인간을 기계의 운전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기계의 고유한 이동 속도 안에서 사람도, 인형도, 실도 함께 결합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동 속도가 이들 독립항들을 하나의 기계로 묶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이 두 손으로 조종하기 때문에 이 기계로는 그런 동작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손을 두 개 가진 사람을 부품으로 갖기 때문에 이 기계는 이런 동작들을 만들어 내는구나’라고 말해야 합니다. 혹은 무용수가 안에 들어가서 춤을 추는 기계 장치가 있다고, 도무지 기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정교한 무용 동작들을 수행하는 기계 장치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에도 역시 ‘역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동작을 기계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라고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기계는 사람을 부품으로 갖기 때문에 이런 동작을 수행하는구나’라고 말해야 하지요.

 

기계는 사람, 도구, 동물, 사물 등이 이루는 근방의 집합이며 이들보다 더 일차적 존재입니다. 사람, 도구, 동물, 사물보다 기계가 선행합니다. 왜냐하면 기계란 이것들을 관통하는 추상적 선으로서 이것들이 한 데 어우러져 작동하게 만드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하나의 등자는 그것이 유목 전쟁 기계에 연결되는지, 아니면 봉건 생산 기계에 연결되는지에 따라 각기 전혀 다른 도구가 됩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 사람이 농사를 짓거나 전쟁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기계가 있고 전쟁-기계가 있습니다. 농사-기계 집합의 부속일 때 사람은 농부가 되고 동일한 사람이 전쟁-기계 집합의 부속이 될 때면 병사가 됩니다. 기계의 성격에 따라 기계의 부속 즉 도구의 성격 또한 변하니까요. 도구가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도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기계는 사회적입니다. 기계는 그것이 관통하는 구조들, 배치하는 사람들, 선별하는 도구들, 추진하는 기술들, 추구하는 목표들의 근본을 이루는 일차적 존재입니다.

 

추상적인 기계들과 무한한 방식으로 그것들에 연결될 수 있는 신체들, 이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많은 종류의 욕망들이 있습니다. 욕망들은 언제나 힘의 강도들, 연속체들, 생성의 블록들, 입자의 발산들, 흐름의 결합들 위에서, 그것들의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욕망의 배치들이 기호의 체제들을 정의합니다. 즉 어떤 연속체들인가, 어떤 생성들인가, 어떤 입자들인가, 어떤 흐름들인가, 어떤 식의 발산이고 어떤 식의 결합인가, 다양한 배치들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무한하게 많은 체제들 가운데 두 가지만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어떤 체제가 하나의 중심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체제를 다른 체제와 구분하는 본질 내지는 핵심이라는 것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기호들의 체제가 만들어지고, 중심을 기준으로 기호들의 의미가 분류되고 배치되는, 다시 말해 하나의 핵심에 의해서 나머지 기호들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체제, 하나의 중심이 나머지 기호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체제가 있다고 말이지요. 이런 체제는 일종의 지도를 연상시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도 그리기를 연상시키지요. 예컨대 지도의 중앙에는 전제 군주가 머무는 궁전이 있고, 마을과 농토, 대장간과 방앗간, 숲과 가시덤불, 그리고 이들 요소들을 연결하는 길들이 있습니다. 지도는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명확하게 나누어 표시하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는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갖느냐에 따라서, 예컨대 그가 감자를 수확하려고 하는지 수확한 감자를 장터에 내다 파려고 하는지에 따라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지요. 누군가 가시덤불인 줄 알았던 곳 사이에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작은 샛길이라도 발견했다면 지도는 즉각 여기에 길이라는 표시를 붙입니다. 지도라는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이지요. 지도공이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에 표지를 붙이고 지도라는 방식으로 기호화하는 것입니다.

이것과는 확실히 다른 체제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기호들이 서로를 가리키고, 기호들의 합이 어떤 중심부를 지시하는 동시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길들이 논밭과 장터를 연결시키고 마을들이 모여 하나의 영지를 표시하는 지도처럼, 기호들이 모여 어떤 중심부를 지시하거나 어떤 중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호들의 집합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호들의 작은 묶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블록들은 자신들의 집합 내부가 아닌 자신과 다른 블록들을 향해, 자신 외부에 있는 블록들을 향해 움직입니다. 이 체제는 기호들의 의미를 규정하는 내부의 중심이 아니라 기호들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외부의 생성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즉 지도처럼 닫힌 평면이 아니라 이동하고 확장하는 선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 체제는 지도의 동시성과는 전혀 다른 선분성과 연속성을 특징으로 갖습니다. 지도라는 전제적 체제에서 하나의 집합을 이루는 각각 기호들이 길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중심부를 바라보게 된다면 지도와 다른 이 선형적 체제에서 기호들은 중심으로부터 돌아서서, 중심을 등지고 아직은 자신의 집합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기호들을 향해 이동합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중심을 등진다기보다는 중심이라는 것을 애당초 갖지 않는다고 말해야겠지요. 이러한 작용이 바로 기호들의 이탈이자 도주이고, 의미의 생성과 발생입니다. 이것은 지도와 전제 군주, 정신분석과 팔루스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주체와 정념의 체제이지요.

 

체제들의 배치 가능성이 무한한 만큼 들 수 있는 예시들 역시 무한하게 많기 때문에 어쩌면 다양한 방향으로 사례를 더 늘려서는 곤란할 것 같군요. 기호 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참고사항을 덧붙이는 것으로 정리할까 합니다. 먼저 기호 체제 안에서 그 체제를 결정하는 추상 기계와 그 체제가 들어가는 구체적인 배치들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 기계를 실행하는 배치들도 구분해야겠지요. 서로 다른 여러 시대에서 제각각으로 발생하는 배치들, 서로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작동하는 기계들 사이에는 인과적 의존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상호 접속이나 시공간의 인접성과는 전혀 무관한 집합들만이 남겠지요. 하나의 신체 위에 여러 판들이, 여러 기계들이 동시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신체는 매우 상이한 기계들에 의해 계속해서 포착될 겁니다. 신체는 매순간 어떤 포착 속에 있겠지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가 미처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신체는 계속해서 여러 배치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 배치가 하나의 신체를 가로지르지요. 이로부터 정신분석의 편집증과 대비되는 신체의 분열과 착란이 발생합니다. 여기에서의 증상은 전혀 개인적이거나 가족적인 것이 아닙니다. 착란은 언제나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것입니다. 세계적 규모에서 펼쳐지는 착란의 역사는 인과나 상징이 미처 확립되기도 전에 신체들을 팔루스적 집착에서 떼어내어 무한한 배치들로 이끕니다. 우리의 신체 위에서 역사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물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기를 바랄까요? 혹은 우리가 그저 식물이나 풍경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미 식물이자 풍경입니다. 에피쿠로스라는 이름은 하나의 인명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고유 명사 즉 에피쿠로스라는 기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원전 지중해에 살았던 어느 남자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에피쿠로스라는 기계가 특정한 배치 속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고유한 배치가, 하나의 고유한 명사가 삶으로서 최초로 생성되어 작동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최초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우리가 기억하는 처음일 뿐이지요. 에피쿠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죽었다고 해서, 즉 에피쿠로스-기계의 배치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이 기계가 작동을 멈추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부품을 바꾸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혹은 다른 부품을 다르게 작동시킴으로써 동일하거나 유사한 작동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에피쿠로스는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지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아주 미시적인 차원에서 펼쳐집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호 체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에피쿠로스가 하나의 기호 체제를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이 가운데 매우 한정된 두 체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제왕적 의미 작용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전제적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의미 작용에서 끝없이 이탈하는 주체와 정념의 체제였지요. 이 두 체제는 편의상 만들어낸 일종의 도식일 뿐입니다. 이 두 체제를 기호 체제의 기본 모델로 삼아 다른 체제들이 이 도식에서 하위 체제를 이룬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두 체제 외에도 수많은 추상 기계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앞서 기호의 블록을 이야기했습니다. 기호들의 블록은 하나의 기계인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기계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에피쿠로스라는 배치를 갖는 에피쿠로스-기계는 그보다 더 큰 철학-기계의 한 부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을 상하위 관계로 환원하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전히 평면적 사고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우리는 크고 작음에서 즉각 큰 것에 포함되는 작은 것, 큰 것의 일부로서 작은 것이라는 관념을 습관적으로 떠올리기 쉽습니다. 커다란 원 안에 있는 작은 원의 그림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신체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무한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수가 정수의 부분이고 정수는 실수의 부분이지만 수학적으로 이들 집합의 크기는 언제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직선은 평면보다 작고 평면은 공간보다 더 작을 수밖에 없지만 함수론적으로 본다면 같은 원리에 의해 직선과 평면과 공간은 동등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설명일 뿐입니다. 기호 체제들의 관계는 수학적 관계에 의해 연역되거나 증명되거나 보증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쩌면 기호들의 체제는 수학보다는 차라리 문학을 더 닮았는지도 모르겠군요. 기호 체제는 언어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문학과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매우 간단한 이 하나의 명제 속에는 문학과 언어활동이 같지 않다는 생각 또한 들어 있습니다. 카프카는 문학을 가리켜 민족의 사업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고독한 언어의 사용자로서 카프카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독일어로 글을 쓰는 체코계 유대인이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민족의 사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유대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독일어로 잘 표현하겠다는, 그래서 이색적인 작가로 독일 문단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다거나 소외된 유대인 집단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겠다는 한심한 기획은 전혀 아닙니다. 카프카는 이런 기획으로부터 누구보다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리적 영토나 언어 사용 집단의 역사와도 전혀 무관합니다. 카프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바로 문학이 언어의 사용 전체를 떠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 사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 민족이 가진 언어 내부에서, 그 언어의 한계 속에서 성립하는 이런저런 언어적 배치들이 문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바로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 한 개인의 화법이나 그의 낱말들, 그의 문구들은 그가 사용하는 그 언어에 속하기를 그치고 점점 더 고유한 색채를 갖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특정 언어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의 규칙들로 환원하기 어려운, 문법적 규칙이든 규범적 규칙이든 관습적 규칙이든 용례적 규칙이든 아무튼 하나의 언어 내부에 존재하는 온갖 규칙들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성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전까지의 특정 언어를 이루고 있던 기호 체제와는 다른 기호 체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카프카의 체제인 동시에 카프카 개인의 체제인 것 이상으로 집단적이고 개방적인 동시에 비밀스럽습니다. 카프카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와 동시에 언어의 가능성 자체를 확장하고 있는 겁니다. 중심과 주변과 길들로 이루어진 지도가 아니라 지도 바깥에 있는 공간으로 끝없이 뻗어 나아가는 질주선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작품에 가장 고유한 것은 그러므로 그것이 쓰인 언어를 초과하는 것이 됩니다. 기호 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정신분석학이 말하듯 중심 기호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 기호에서 만들어지는 의미 작용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언어를 초과하도록 특징짓는 욕망의 일관성이기 때문입니다.

 

주체는 오직 그곳에만 존재합니다. 가장 개성적인 방식으로, 가장 고유한 삶과 스타일로, 지도 평면의 기호가 아닌 하나의 질주선으로서요.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 질주선 위에서 인격의 특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강렬한 개체성에 도달한 주체는 극도로 개방적인 동시에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주체는 삶이라는 고유 명사에 다름 아닙니다.

2022. 6. 17. / BIBLIOTH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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